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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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죽은 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나를 잘 알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래서 그 진술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면 그건 나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울까요?

미묘한 차이를 넘어 사람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기억을 토로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나의 진실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악녀에 대하여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의문의 죽음을 맞은 신비한 여인

도미노코지 기미코의 27명의 지인들이 유력 주간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 형식의 소설입니다.

지인 중에는 그녀를 거쳐 간 남자들도 있고, 가족도 있고, 호불호가 갈리는 타인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녀를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현명하고 주관이 뚜렷한 여자로 기억하는 반면,

누군가는 그녀를 희대의 사기꾼에 두 얼굴을 가진 악녀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녀가 잠자리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성을 지른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평범한 수준 또는 오히려 수줍어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분에 넘치는 응원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그녀로부터 평생 치유되지 못할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분노합니다.

심지어 몇몇 남자들은 그녀가 낳은 두 아들의 아버지가 자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단순한 기억의 오류라고 하기엔 그들의 진술은 일관되고 앞뒤가 딱딱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1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긴 세월에 걸쳐 기미코가 주변사람들에게 보인 모습은

(그들의 진술을 믿자면) 그야말로 팔색조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제각각이었고,

그것도 다중이에 버금갈 정도로 극과 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대낮에 화려한 빨간 드레스를 입은 채 7층에서 추락사한 정황을 놓고도

그녀다운 자살이다’, ‘그만큼 죄를 지었으니 타살당한 게 분명하다며 공방이 벌어집니다.

 

지인들의 진술이 한 챕터씩 이어질 때마다

독자는 첫 페이지 이후부터 나름 머릿속에 그려온 기미코의 캐릭터를 계속 수정해야 합니다.

희대의 악녀타고난 팜므 파탈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그녀에게 분노하다가, 그녀를 동정하다가, 때론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마지막 페이지에서 드러날 기미코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녀는 왜 그렇게 영화 같은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

자살이라면 왜? 타살이라면 누가 범인인지?, 너무너무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로만 봐서 원작소설에서는 어떻게 묘사됐는지 잘 모르지만

읽는 내내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의 여주인공 유키호가 생각났습니다.

참혹한 유년기와 빛과 그늘이 교차한 성장기, 그리고 비극적인 엔딩까지

이상하게도 유키호의 그림자가 기미코의 삶 여기저기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꿈꿀 수도, 실행할 수도 없는 희비극 같은 삶을 살았던 기미코.

과연 27명의 진술 가운데 어떤 것들이 그녀의 진실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을지,

아니, 그런 진실에 관한 진술이란 게 애초에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인지,

작가는 독자에게 무척이나 어렵고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독자 스스로 정답 없는 자문을 하게끔 만듭니다.

 

내가 죽은 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나를 잘 알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래서 그 진술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면 그건 나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울까요?

미묘한 차이를 넘어 사람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기억을 토로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나의 진실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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