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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평점 :
평생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부유물처럼 살다가 외롭게 죽어 간 아버지,
그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삶을 견디다가 끝내 치매에 힘입어 기억을 지워버린 어머니,
진작 자신의 출생을 결정할 수 있었다면 마씨 집안에 태어나기를 거부했을 것만 같은,
그래서 결국 ‘발목 잡는 것도 없고, 인연도 없는’ 삶을 택해 멀리 남태평양으로 도망친 형,
그리고 그런 가족들에게 달라붙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
그들이 남긴 슬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그저 남루한 삶을 이어갈 뿐인 동생...
서로를 당기기도 밀쳐내기도, 서로에게 상처주기도 상처받기도 하면서
가족이라는 끈에 묶여 60여 년을 살아온 마씨 집안의 신산스러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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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은 김훈의 소설 가운데 (단편을 제외하고) 가장 ‘작은 소설’입니다.
작가 스스로 후기를 통해 ‘작은 소설’이라 표현하기도 했지만,
그냥 뼈대만 추려서 말하면 ‘공터에서’는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남루한 가족의 이야기이고,
좀더 보태려고 해도 서사 자체만으로는 크게 확장해서 설명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후기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김훈은 왜 이 이야기를 쓴 것일까?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그 기억과 인상들은 오랫동안 내 속에 서식하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부딪치고 싸웠다. (중략)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쥐고 쓸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 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나는 그 기억과 인상들이 이제는 내 속에서 소멸하기를 바란다.”
(작가 후기 中)
다른 독자들의 소감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아쉬웠다’는 평이 제법 눈에 띄었습니다.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막상 작가의 후기를 읽고 나니,
마씨 집안 연대기의 진정성과 인물들의 존재감이 조금은 묵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기억과 인상의 파편’이라 칭한 것은
실제 현실에 존재했던 작가 주변의 인물이나 사건이 남긴 흔적일 수도 있고,
전작들에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아쉬움 또는 쓰고 남은 상상력의 잔재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됐든 작가 스스로 세상에 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숙제’였다는 점에서
그가 마씨 집안의 60여년의 시간을 그린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만주, 길림, 상하이를 전전하다
한국전쟁 중의 부산에서 아내 이도순을 만난 마동수는
평생을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바람처럼 나타나곤 했던 부평초 같은 남자입니다.
이도순은 흥남 철수 길에 전 남편과 딸을 잃은 뒤 마동수를 만나 두 아들을 낳았지만,
마동수를 만난 일도, 두 아들을 낳은 일도 평생 후회하면서 살아온 여자입니다.
장남 마장세는 그런 부모들을 원망하고 증오한 끝에
베트남 참전 직후 괌으로 도망치듯 날아가 그곳에서 모든 가족의 연을 끊고 살아갑니다.
차남 마차세는 마씨 집안의 불온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무력한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요양원의 어머니를 모시며
자신을 닮은 여자 박상희를 만나 누니라는 딸을 낳으며 또다시 일가를 이룹니다.
그들은 서로를 용서하지도, 서로에게 화해를 권하지도 않습니다.
선을 긋거나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것은 시대의 탓만도 아니고, 그들의 타고난 인격 탓만도 아닙니다.
숙명일 수도 있고, 업보일 수도 있고, 시대와 인격의 잘못된 만남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그냥 그렇게 마씨 집안의 60여년을 담담하게 들여다보듯 풀어놓고 있습니다.
캐릭터도 스토리도 새로움과는 거리가 먼 설정이고,
서사는 ‘김훈’이라는 이름이 예고한 깊이나 무게에 비해 작고 가벼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 특유의 은유와 상징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어느 작품에서나 그랬듯 그의 문장은 곱씹을수록 향기가 짙어졌고,
극단적인 감정은 오히려 짧고 평범한 언어로 쓰인 탓에 더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역시 어딘가 허허로운 뒷맛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 뒷맛은 ‘김훈의 서사’에 대한 기대감이 배반당한 탓일 수도 있고,
거점이나 발 디딜 곳을 잃고 부초처럼 살아온 마씨 집안의 내력 탓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의 후기를 읽고 나름 위로(?)받은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다음 작품에서는 김훈만이 남길 수 있는 깊은 후유증을 기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