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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가족놀이 ㅣ 스토리콜렉터 6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7년 2월
평점 :
도코로다 료스케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공사 현장에서 잔인한 변사체로 발견된다.
경찰은 수사 끝에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것처럼 보였던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가상가족놀이'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로 연극을 해왔던 것.
진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인터넷상의 가상가족에게만 몰두한 피해자.
경찰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대미문의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진짜 가족이 매직미러 너머로 취조실을 지켜보는 가운데,
피해자와 함께 인터넷상에서 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오는데….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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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R.P.G’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던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짤막한 줄거리만 메모로 남긴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도 (부실한 기억력 때문인지^^) 여전히 새롭고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던 2000년대 초반이 배경이라
스마트폰이 대세인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채팅이나 게시판에서의 가상가족놀이는
조금은 올드하게 보일 수도 있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많은 작품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미스터리 속에 정교하게 녹여냈던 미미 여사는
‘현실 속 가족’과 ‘가상현실 속의 가짜 가족’이라는 극단적인 대비를 동원하여
그 올드함을 무색하게 하는 보편적인 서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익명성에 의지하여 가상의 세계에 잠복한 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들을 추구하고 만족과 구원을 느낀다는 것은
인터넷의 맹아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상가족놀이에 참여한 네 명의 인물은 (조금씩 성격은 다르지만)
현실의 가족들에게 만족하지 못하거나 상처받거나 분노해온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저 채팅과 메일이 전부이고 딱 한 번 오프라인에서 만난 적 밖에 없지만,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의무도 강요하지 않는 가상현실 속의 가족들에게서 위로받으며
현실의 가족을 내팽개친 채 그들만의 놀이를 즐겨왔습니다.
하지만 그들만의 놀이는 어느 시점인가부터 가상현실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비뚤어진 욕망, 시기, 질투라는 현실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는 취조실입니다.
살해당한 ‘가장’ 도코로다 료스케를 제외한 세 명의 가짜 가족들이 차례로 불려오고,
매직미러 너머에서는 도코로다의 딸 가즈미가 진범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밀폐된 취조실에서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친밀한 가족’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제 멋대로인 놈, 늘 여리고 착한 척만 아는 철부지, 욕망에 눈 먼 아줌마 등
서로를 날선 말들로 비난하며 자신들이 꾸며온 ‘친밀한 가족’을 붕괴시킵니다.
애초 가상현실에서 구원받고 싶어 했던 서로의 처지까지 들먹이면서 말이죠.
매직미러 너머의 가즈미는 자신이 증오했던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려둔 채
저런 사람들과 ‘친밀한 가족’을 이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범인의 정체를 쉽게 알아챌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누가 범인일까?’라는 미스터리보다
허위와 기만으로 꾸며진 ‘가상의 가족’의 양면성에 좀더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에
미미 여사의 ‘강력한 미스터리 서사’를 기대한 분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붕괴된 가족, 소외된 개인, 인터넷 속 익명성의 유혹, 가상현실에서의 대리만족 등
한데 엮기 쉽지 않은 사회적 이슈를 적절한 규모의 미스터리와 잘 배합한 미미 여사의 필력은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와 여운을 깊게 남겨놓습니다.
식탁에 마주앉아서도 대화 한마디 없이 각자의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진짜 가족’을 외면한 채 가상현실에 몰두하는 요즘의 세태를 보면
미미 여사가 창조한 ‘가상가족놀이’는 어쩌면 더욱 잔혹하고 비극적인 모습으로
2017년의 현실에 불쑥 나타날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