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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감옥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41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사라진 소녀들’, ‘지옥계곡’에 이어 세 번째 만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작품입니다.
외국작가의 경우 보통 ‘재미와 대중성’ 순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탓에
첫 작품에 열광했다가도 뒤로 갈수록 시들해지는 경우가 적잖은데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저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서평 대신 짧은 메모만 해놓던 시절에 읽은 ‘사라진 소녀들’은 별 3.5개 정도였고,
‘지옥계곡’ 역시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별 4개가 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물의 감옥’은 전작들에서 느낀 아쉬움들이 많이 해소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하지만 독일 출간은 ‘물의 감옥’이 ‘지옥계곡’보다 1년 먼저더군요)
희생자를 끌어안은 채 깊은 호수 속에서 ‘춤을 추며’ 익사에 이르게 하는 살인마 ‘물의 정령’,
한때 명성을 날렸지만 이혼 이후 몰락의 길을 걸어온 마초 형사 에릭 슈티플러,
살인사건 수사팀에 갓 배치되어 슈티플러의 파트너가 된 새내기 여경 마누엘라,
동료가 살해된 뒤부터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전직 콜걸 라비니아,
우연한 만남을 통해 알게 된 라비니아를 보호하기 위해 분투하는 택시기사 프랑크 등
모두 5명의 주요 인물들이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갑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범인은 목표물과 인연이 있는 여자들을 익사시키면서 천천히 복수를 완성해갑니다.
목표물은 범인의 위협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며 심지어 자살을 꾀하기도 합니다.
신참 여경은 상관의 지시보다 자신의 정의감을 앞세워 사건을 해결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각각의 인물들에게 특별한 캐릭터와 전사(前史)를 부여함으로써
단순히 진범 찾기와 진실 파헤치기 이상의 묵직한 서사를 제공합니다.
연쇄살인범의 경우, 왜 스스로를 ‘물의 정령’이라 칭하는 것인지,
호수와 수영과 여동생을 사랑했던 그의 어린 시절과 가족들이 어떻게 잔혹하게 파괴됐는지,
그에게 ‘물속에서 춤추며 살해하기’란 어떤 의미인지를 긴장감 넘치게 묘사합니다.
마초 형사이자 성차별주의자인 슈티플러의 경우 묘한 이중적 캐릭터를 부여받았는데,
명백한 악인이면서도, 동시에 타의에 의해 인생이 망가진 운 나쁜 중년남이란 면모입니다.
악인이라 망가진 건지, 망가진 탓에 악인이 된 건지,
슈티플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자에게 양가적 감정을 갖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신참 여경 마누엘라는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익숙한 캐릭터인데,
어쨌든 그녀의 돌직구 같은 추진력과 예리한 추리력은
연쇄살인범과 부패한 경찰의 서사의 무게를 감당해낼 만큼 제법 무겁게 설정돼있습니다.
작지만 음험해 보이는 검은 물의 호수 고레크,
수시로 몰아치는 천둥과 번개와 강풍과 폭우,
핀란드 태생인 연쇄살인범의 ‘물의 정령’이라는 별명 등
‘물의 감옥’은 여러 모로 북유럽 스릴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바닥을 알 수 없는 검은 호수 물속에서 자행되는 연쇄살인은
지금껏 본 그 어떤 수법과도 비교할 수 없는 냉정+잔혹+쾌락의 느낌이 배어있는데,
왠지 독일보다는 스웨덴 등 차가운 북유럽과 어울린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곤 했습니다.
북유럽 특유의 묘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호감을 가질 만한 설정입니다.
(까마득한 높이의 알프스 계곡에서의 추락사로 연쇄살인의 서곡을 연 ‘지옥계곡’ 역시
북유럽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또다른 미덕 중 하나는 이분법적인 시선에서 ‘악’을 그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모호함은 독자에 따라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저로서는 ‘악을 그저 악으로만’ 그렸다면 이 작품의 매력은 반감됐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적절한 수위를 유지하면서
동전의 양면처럼 선악을 공유한 인상 깊은 캐릭터들을 만들어냈고,
그 덕분에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여러 가지 회한과 여운을 느낄 수 있게 해줬습니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아보면,
연쇄살인범 ‘물의 정령’의 복수심의 원천, 즉 과거의 상처 묘사가 조금 약했다는 점과
살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그의 모습이 과도하게 판타지처럼 그려져
때론 정말 ‘정령’처럼 느껴진 나머지 현실감을 잃곤 한다는 점 정도입니다.
‘별로 매력 없는 형사와 범인’(사라진 소녀들), ‘뜬금없는 범인과 범행동기’(지옥계곡) 등
전작들에 대해 비우호적인 평을 했던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캐릭터, 사건, 정서 등 여러 면에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진수를 맛본 작품이 돼준 ‘물의 감옥’이었습니다.
사족으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홈페이지를 보니 아직 국내에 소개 안 된 작품들이 있더군요.
‘킬게임(Killgame)’, ‘데스북(Deathbook)’, ‘사육(Die Zucht)’ 등이 눈에 띄었는데,
안드레아스 빙켈만이 국내에서 조금만 더 분발(?)해준다면
미 출간작품 전부를 머지않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기대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