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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ㅣ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평점 :
‘천사의 나이프’나 ‘하드 럭’에서도 그랬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이야기를 빙빙 돌리지 않고 민감한 사회적 문제,
특히 개인의 복수 또는 구조적으로 코너에 몰린 약자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파고듭니다.
‘악당’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 복수와 증오, 화해와 용서 등을 다룬 작품입니다.
주인공 사에키 슈이치는 15살 생일날 참혹한 범죄로 인해 누나를 잃습니다.
누나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그가 선택한 길은 경찰이었지만,
죄책감 없는 악당들을 향해 치솟는 분노를 자제하지 못해서 제복을 벗어야 했고,
지금은 조그만 탐정사무소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록된 7편의 연작 단편은 그가 의뢰받은 건의 조사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의뢰 자체가 ‘과거 범죄를 저질렀던 자의 현재를 알고 싶다’는 내용들이라
여전히 누나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에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뢰인은 피해자, 유족, 변호사 등 다양하지만
그들이 알고 싶은, 또 고민하는 지점들은 거의 비슷합니다.
즉, 가해자는 진정으로 갱생했는가? 피해자나 유족에게 사죄하고 있는가?
설령 갱생하고 사죄한다 해도 피해자와 유족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상처를 잊을 수 있는가?
만일 그 자가 죄책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안락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어찌 해야 되는가?
피해자나 그 유족들이 멀쩡히 살아있는 가해자와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그 자신이 범죄 피해자의 유족인 사에키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각기 다른 에피소드들 속에서 사에키는 자신이 해결한 일들 때문에
대부분의 의뢰인들이 오히려 더 큰 고통에 빠지는 모습들을 지켜보게 됩니다.
상처는 절대 치유되지 않고, 속죄란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피해자와 유족은 평생을 악몽과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가해자는 터무니없이 가벼운 형벌만 받곤 당당하게 일상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에키는 의뢰를 받을 때마다, 또 미션을 완수할 때마다 새로운 고통을 맛봅니다.
당연히 그 일로 밥벌이를 하는 자신을 혐오합니다.
하지만 그는 탐정으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누나를 능욕하고 살해한 범인들을 쫓습니다.
그 자신이 의뢰인이자 탐정이 되어 복수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복수가 완성된다 해도 그것으로 모든 악몽이 지워지진 않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이유도, 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독자는 사에키의 딜레마 때문에 공분과 좌절을 함께 느끼게 되는데
이런 감정은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경험하게 되는 씁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미나 여운 모두 수록작마다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제3자의 시선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고 있어서
단순히 개인의 복수를 다룬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탐정 사에키’뿐 아니라 ‘피해자이자 추격자 사에키’의 비극적인 이야기 역시
작가의 전작들에서 맛봤던 특유의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발산하고 있어
‘역시 야쿠마루 가쿠’라는 호평이 저절로 나오게 만듭니다.
다만, 연작 형태이긴 해도 단편이다 보니 이야기의 규모나 깊이가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매력은 그가 다루는 소재 자체에도 있지만
후벼 판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게 파고드는 서사의 힘에 기인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단편보다는 장편이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통쾌함이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먼 그의 작품들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그의 작품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