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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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소설가가 중국 송나라 때의 법의학자 송자를 주인공으로 쓴 역사소설입니다.

태생(?) 자체가 무척 특이한 작품입니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현직 공대 교수면서 역사소설가라는 작가의 이력은 더욱 이채롭습니다.

 

시체 읽는 남자는 제목 그대로 법의학을 다룬 작품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법의학서라 불리는 세원집록을 집필한 송자는

의술 자체가 천대받던 13세기 송나라에서 중국 최고의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입니다.

(비록 대부분 픽션이긴 하지만) 작가는 고난으로 얼룩진 송자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하여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기어이 판관의 자리에 오르는 그의 성장-성공 스토리를

법의학 + 법정 미스터리라는 긴장감 넘치는 서사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송자가 겪는 젊은 날의 시련은 좀 지나칠 정도로 혹독합니다.

배신, 사기, 모함 등으로 인해 온 가족을 잃는가 하면,

고향을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된 뒤에는 추격자를 뿌리쳐야 하는 위기의 순간들을 넘깁니다.

한가닥 희망을 안고 도착한 도성에서는 예기치 못한 좌절을 겪으면서

공부에 대한 열망마저 접은 채 공동묘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이 과정에서 송자는 보통 사람 같으면 적어도 5~6번은 죽고도 남을 고비를 겪게 됩니다.

송자의 성공을 빛나게 하기 위한 작가의 기초공사였겠지만

어떤 때는 이렇게까지 주인공을 괴롭혀야 되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작가는 송자를 절벽 끝까지 수도 없이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그 시련들은 송자에게 또다른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공동묘지에서 여러 종류의 시신들을 접하면서

송자는 책이나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를 통해 검시관으로서의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가게 됩니다.

좀 장황하게 묘사되긴 하지만 송자가 겪는 시련들은 그를 타고난 천재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시킨 노력형 천재로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돼줍니다.

 

CSI 등의 미드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송자가 선보이는 검시, 해부, 법의학적 판단이

그리 새롭거나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13세기 송나라의 상황을 감안하면

당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송자의 법의학에의 열의와 노력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여곡절 끝에 궁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된 송자가

참혹한 시체들과 사건 현장에서 미세한 단서들을 찾아내며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는 대목은

CSI도 부럽지 않은 세밀함과 정교함을 자랑합니다.

 

작가는 송자를 시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법의학자에 머물게 하지 않고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현명한 판관의 캐릭터까지 발전시킵니다.

마지막 절정부에서 황제를 앞에 두고 적들과 벌이는 한판의 법정 대결은

현대 영미권의 뛰어난 법정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팽팽한 승부로 묘사됩니다.

송자는 자신이 찾아낸 단서들을 통해 상대의 모함을 하나하나 깨부수는가 하면,

아무도 예상 못한 범인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황제를 비롯한 궁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습니다.

 

물론 송자의 뛰어난 추리력에 대해서는 독자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시체 읽는 남자, 즉 검시관의 영역을 뛰어넘어 수사관 역할까지 해내는 송자가

이때만큼은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완벽한 스펙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워낙 스피디하게 전개되는데다 긴장감으로 꽉 차 있어서

그 정도의 위화감은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13세기 동양의 법의학자라는 소재도 흥미로웠고,

오래 전 방영된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서사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젊은 날의 송자에게 주어진 시련이 좀 과한 느낌이 들었고,

구성 면에서도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초중반까지 약간의 지루함을 주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런 아쉬움은 중반부터 발휘되는 속도감과 긴장감,

그리고 마지막에 터지는 반전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었습니다.

진실을 밝힘으로써 황제의 인정을 받은 송자가

본격적인 판관으로 역할하게 될 후속작을 기대하는 것은 비단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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