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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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순서대로 읽기를 시작한 게 2014년인데,

이제 세 번째 작품을 읽었으니 꼭 1년에 한 편씩인 셈입니다.

사실 출간 순서대로 치면 저녁의 구애전에

장편 재와 빨강이 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두 번째 단편집인 사육장 쪽으로아오이 가든에 비해 순화(?)된 느낌을 줬다면,

저녁의 구애는 좀더 일상성이 강조된, 즉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캐릭터 면에 있어서는 사육장 쪽으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은 어딘가 마이너의 성향이 강하거나 또는 일부 문제적 인간들로 보이지만

실은 상실감과 익명성, 단절과 고립이 몸에 배어버린 대다수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어느 쪽이 됐든 그들은 그 뒤로도 여전히 불행할 것이 분명하다.”는 암울한 인상을 남깁니다.

사육장 쪽으로의 인물들은 닭장이나 사육장처럼 도망칠 수 없는 갇힌 환경에 처한 채

출구 없는 먹먹한 삶을 살다가 잠시 희망에 들떠 모종의 일을 벌이지만

어이없는 실수로 망가지거나 진창을 헤매며 끝없는 늪으로 사라져버립니다.

그에 비해 저녁의 구애의 인물들은 오전과 다를 게 없는 오후,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내일 등

다람쥐 쳇바퀴 같은 동일성의 지옥에 빠진 채 무의미한 현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 동일한 점심

이런 주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텍스트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하 복사실을 운영하는 는 매일 정오 구내식당에서 늘 비슷한 메뉴로 점심을 해결합니다.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의 전철을 타고, 새로울 것 없는 복사로 하루를 보냅니다.

누구도 에게 복사에 관한 주문 외엔 말을 건네지 않으며,

역시 누구에게도 2m 이내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의 복사된 일상을 깨뜨리는 사건이 벌어진 날, 그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 외에도 매일 무의미한 서식만 작성하는 남자 (토끼의 묘),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계속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남자 (정글짐),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계적으로 통조림을 밀봉하는 사람들 (통조림 공장)

소통과 관계가 단절된 채 동일하게 반복되는 복사된 삶에 매몰된 인물들의 비극은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는 아닙니다.

물론 누군가는 내겐 미래가 있고, 지금의 삶 역시 변화무쌍하며 의미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야말로 특별한 소수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저녁의 구애아오이 가든에 비해 한층 순화된 듯 보이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집입니다.

 

동일하게 복사되는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삶저녁의 구애의 대표 정서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의반, 타의반으로 찾아온 불행을 다룬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반복적이고 무의미하지만 나름 무탈하게 유지돼온 일상들은

입과 귀로 파고드는 하루살이 떼, 내 곁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자살이나 실종이나 교통사고,

낯선 이국땅에서 길을 잃은 당혹감, 사소한 자동차의 고장 등에 의해 순식간에 파열됩니다.

상사의 지시에 따라 정체불명의 자루를 운반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 (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세든 집의 덩치 큰 개, 불온한 숲의 멧돼지의 울음, 만삭의 아내에게 둘러싸인 남자 (산책),

본사 발령을 받고 서울로 오는 길에 폭우와 폭력에 노출된 남자 (크림색 소파의 방)

전작인 사육장 쪽으로의 수록작들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그것입니다.

 

말미에 수록된 평 가운데 저녁의 구애의 두 가지 미덕을 한마디로 잘 정리한 대목이 있는데,

편리하고 안온한 일상이 소름 끼치는 불안과 암흑,

그리고 끝 모를 공포로 탈바꿈해가는 순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라는 부분입니다.

편혜영의 작품들이 서사의 힘과 현실감을 동시에 획득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 평이 아닐까요?

 

다만, 몇몇 작품에서는 이런 주제의식을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장치들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보다는 작위적인 느낌, 즉 멋을 부린 듯한 개운치 않은 느낌도 받게 됩니다.

또 누군가의 분석이나 설명 없이는 작가의 의도를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전작에서도 이런 느낌은 분명 있었지만,

저녁의 구애의 경우 전작보다 현실감이 강한 수록작들이 많아서 그런지

역설적으로 위화감 역시 강하게 느껴진 탓일 수도 있습니다.

 

1년에 한 편 꼴로 읽고 있는 상황에서 편혜영의 다음 작품을 언제쯤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색깔을 바꿔 가며 독자를 당혹시키는 그녀의 글이

다음 작품에선 어떤 모양새로 제 앞에 나타날지 궁금해집니다.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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