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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평점 :
후카세 가즈히사는 스스로를 ‘색이 없는 공기 인간’이라 여깁니다.
유년기부터 또래들의 무시와 냉대, 투명인간 취급에 익숙해진 나머지
성인이 된 지금도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은 물론 주인공으로 대접받는 일에 서툰 남자입니다.
다만, 누군가가 “후카세도 같이 갈래?” “후카세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오기라도 하면
온몸이 경직되고 식은땀부터 흘릴 정도로 열등감과 자괴감에 사로잡히면서도
그렇게 말해준 누군가가 너무 고마운 나머지
잠시나마 투명인간에서 벗어날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 사무기기 업체에서 일하는 그가 누리는 소소한 행복은
직접 내려 마시는 진한 향기의 커피와 3개월 된 사랑스런 여자 친구 미호코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어느 날 미호코가 갖고 온 편지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후카세는 몇 년 전, 대학 친구들과의 여행길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고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곤 자책감과 함께 의문의 편지의 발신자를 찾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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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는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이니 당연히)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작품이지만
제겐 ‘색이 없는 공기 인간’의 일그러진 삶을 그린 심리물에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출판사 책 소개대로 ‘데뷔 이래 천착해온 테마인 복수와 속죄’가 바탕에 깔려있고
한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우발적인 사고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가 메인으로 전개되지만
작가는 ‘범인은 누구?’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후카세의 번민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선지 미나토 가나에의 여느 작품보다 중반에 이르기까지 속도가 잘 안 나는 작품입니다.
후카세가 공기 인간으로 살아온 여정을 확인해야 되고,
성인이 된 현재까지 그 강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을 재확인해야 하고,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는 물론 그 이후의 대처 과정에서도
전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후카세의 번민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반부, 그러니까 한 친구의 죽음과 나머지 네 친구의 사고 당시의 ‘비밀’이 드러나고
후카세가 스스로를 다그쳐 편지의 발신자를 찾겠다고 나선 이후부터 이야기는 속도를 내지만
후카세의 여정은 여전히 탐정이나 경찰의 조사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입니다.
즉, 그의 조사는 ‘진상 찾기’가 아니라 죽은 친구의 과거를 훑어 올라가는 일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공기 인간이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후카세는 거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의 고향을 찾아가 부모와 동창들을 만나면서
후카세는 그 친구가 왜 사건 당시 아무도 나서지 않는 위험을 무릅썼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왜 공기 인간이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줬는지도 알게 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책과 회한에 잠겼던 후카세는 돌아오기 직전
자신을 포함, 여행에 동행했던 모든 이들에게
‘OOO는 살인자다.’라는 편지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지만 후카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진실입니다.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간 덕분에 미스터리보다는 심리물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은 셈인데
내용은 다르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단편집 ‘왕복서간’에 수록된 ‘십 년 뒤의 졸업문집’에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는 느낌이 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학창시절을 배경으로 삼아서 그런 것인지,
친구들 사이에 존재했던 위험한 비밀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에도 세밀한 심리묘사와 반전 덕분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만끽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을 한 가지 꼽자면 왠지 쉽게 이입되지 않는 캐릭터의 문제입니다.
후카세처럼 공기 인간으로 살아본 적도 없고,
후카세의 친구처럼 누군가를 따뜻하게 배려하며 살아본 적도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야기에 맞춰 캐릭터가 과대포장 또는 작위적으로 설정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맞게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됐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해부하는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는 미나토 가나에에 대한 찬사는
(100%는 아니더라도) 거의 매 작품에서 어느 정도는 공감해왔지만,
‘리버스’ 만큼은 해부와 관찰 대신 의도적 설정이 더 강했던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그녀의 작품 중에 이제 딱 절반(6편)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명성에 비하면 의외로 적게 읽은 편인데
아마도 두 번째로 읽은 ‘야행관람차’의 충격(?)이 컸던 탓으로 여겨집니다.
제게 ‘리버스’는 ‘고백’과 ‘꽃사슬’에 이어 ‘왕복서간’과 함께 공동 3위 정도랄까요?
늘 ‘고백’을 뛰어넘는 작품을 기대하다가 만족보다는 실망을 느낀 일이 많으면서도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아직도 설레는 것이 사실입니다.
초기에 비해 출간편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내년에도 한편쯤은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을 꼭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