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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ㅣ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권일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2월
평점 :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면서도 그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지금까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책장에 ‘외딴 섬 악마’가 꽂혀있지만 매번 ‘다음에 읽어야지’하면서 뒷전으로 밀리는 바람에
몇 년째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신세입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결정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그의 선집을 만나게 됐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편의 단편과 1편의 장편으로 구성된 ‘결정판 1’은
저처럼 에도가와 란포에 입문하는 독자에겐 더없이 좋은 텍스트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코드들,
즉 극단적인 고통과 쾌락, 엿보기, 성적 도착, 괴기와 잔학, 환상 등이 골고루 녹아있는데다
20세기 초반의 날것 같은 정서들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나머지 액자 속 인형이 돼버린 남자의 이야기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전쟁으로 인해 목소리와 청각은 물론 사지까지 잃어버린 전직 군인과
그의 곁에서 자학과 욕정에 번민하며 살아가는 젊은 아내의 이야기 (애벌레),
엿보기에 심취한 끝에 죄의식 없는 살인에 이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 (천장 위의 산책자),
그리고 49명의 여자를 일시에 납치, 살해하려는 희대의 소시오패스 이야기 (거미남) 등
현대를 배경으로 했을 때는 도저히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기이한’ 이야기들이 실려있습니다.
요즘의 눈높이로 보면 사건이나 캐릭터가 조금은 거칠고, 덜 세련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에도가와 란포가 살던 시대의 ‘원시성’에 기인한 것이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즉, 1920년대의 100% 아날로그적인 원시성이 투사된 사건과 캐릭터들은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낯설고 투박하게 느껴질 여지가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낯섦’과 ‘투박함’이야말로 에도가와 란포의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마치 요코미조 세이시나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죠..
에도가와 란포가 선호하는 코드들 역시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데,
원색적인 나머지 호러 또는 엽기의 느낌까지 나는 그의 코드들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누구나 의식 혹은 무의식 속에 조금씩은 갖고 있는 본능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쾌락, 엿보기, 성적 도착, 괴기, 잔학 등 ‘나만의 내밀함이라 여긴 본능’들이
활자를 통해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을 지켜보며
마치 거울을 보는듯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할까요?
클래식으로서의 품격이나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라는 명성에 큰 기대를 한 ‘입문 독자’라면
약간의 아쉬움과 이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요코미조 세이시나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을 좋아하는 제 입장에선
좀더 다양한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접하고 싶다는 기대를 갖게 해준 ‘결정판 1’이었습니다.
물론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외딴 섬 악마’도 빨리 구출(?)해줘야할 것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