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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국내에 출간된 요시다 슈이치의 많은 작품 가운데 정작 읽은 것은 몇 권 안 되지만,
그의 작품의 공통점은 ‘줄거리는 희미해져도, 그 느낌만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읽어 줄거리나 인물은 그 윤곽 밖에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안에 배어있던 정서나 냄새(?)는 지금 막 책장을 덮은 것처럼 생생히 떠오른다는 뜻입니다.
‘악인’과 ‘분노’를 제외하곤 대체로 순하거나 애틋한 느낌들이었는데,
현란하지도, 과한 수식도 없는 문장들이 전해준 그 느낌들은 무척이나 따뜻했습니다.
‘악인’과 ‘분노’는 그와는 정반대로 적나라하게 그려진 악의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스토리 자체보다 다 읽은 후에 느낀 섬뜩함으로 기억되는 작품들입니다.
이처럼 늘 ‘느낌’으로 어필했던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이라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역시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첫 페이지를 열면서
(단지 제목 때문에) 덴카와 아야의 ‘태양의 노래’ 같은 애틋-따뜻 스토리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품이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를 뺨치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캐릭터와 비현실적인 스토리로 버무려진 첩보물임을 깨닫곤
책 표지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새삼 다시 확인해야 했습니다.
솔직히 할리우드의 정교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첩보전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최첨단 우주 태양광 발전 시스템을 둘러싼 국제 첩보전’이라는 카피는
아무리 요시다 슈이치의 팬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주저하게 만들 만한 ‘황당한’ 문구입니다.
중국과 일본이 주연이고 한국도 조연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총도 맘대로 못 쏘는 아시아를 무대로 무슨 대단한 첩보전이 가능하겠어?’라는
일종의 선입견이 들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요시다 슈이치가 만들어낸 ‘한중일 합작 아시아 판 첩보전’은
본 시리즈처럼 요란한 총격전과 액션 장면 없이도 충분한 재미와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빈틈없이 정교한 설계도, 초인적이지만 분명 어딘가 존재할 것 같은 리얼한 캐릭터,
‘말빨’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순도 100%의 정보전, 적절하고 매력적인 반전 등
첩보물의 미덕도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우주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라는 소재도 알고 보면 눈앞에 다가온 현실적인 소재라
결코 공상 속의 이야기로 보이진 않습니다.
물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놀라운 공간 이동이라든가,
앉은 자리에서 사방의 정보를 습득하는 만능 첩보 능력,
또, 거의 슈퍼맨 급 스펙을 갖춘 요원들의 다재다능함은 가끔씩 위화감을 줍니다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첩보물이라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요시다 슈이치만의 힘도 분명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그 힘은 그저 총 잘 쏘고, 발차기 잘하는 액션 히어로 대신
그만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든 상처투성이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부모에게 비참하게 버려진 후 조직에 의해 피도 눈물도 없는 요원으로 키워진 첩보원들,
약자로만 살아온 과거를 버리고 강하게 살기 위해 첩보원이 되기를 꿈꾸는 여자,
작전을 위해 위장된 사랑을 택했지만, 그로 인해 평범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 스파이 등
독자에게 애틋하거나 응원하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갑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 작품에 관해 “목소리(캐릭터)를 희생하고 스토리를 살렸다”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스토리만큼이나 캐릭터가 분명히 살아있는 작품이란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낯설긴 했지만 이야기꾼 요시다 슈이치의 새로운 면모를 만난 것 같아 반가웠고,
이만한 캐릭터와 배경 설정이라면 시리즈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기대감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