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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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위대에 납품할 최신예 거대 전투 헬기 B’가 최종 시험 비행을 앞두고 피랍된다.

B’는 대량의 폭발물을 실은 채 천공의 벌을 자처하는 범인의 무선 원격 조종에 의해

후쿠이 현 쓰루가 시의 원전 바로 위 800미터 상공을 선회한다.

범인은 일본 전역의 원전을 모두 폐기하지 않으면 헬기를 추락 시키겠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 사항과 현장 상황을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할 것을 요구한다.

남은 시간은 8시간. 일본 열도는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공포에 휩싸인다.

헬기의 연료는 시시각각으로 소진돼 가고, 원전 주변 주민들의 엑서더스가 벌어지는 가운데

정부와 자위대, 경찰, 원전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하며 범인의 요구에 대책 없이 끌려 다닌다.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원전을 소재로 해서 그런지 남의 이야기처럼 그저 재미로만 읽히지는 않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집필된 1995년에만 해도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조차 공상으로 치부됐을지 모르지만,

세상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자로의 종말을 똑똑히 지켜봤고,

올해 경주 지진으로 한국에서도 원전에 대한 두려움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 원전을 볼모삼아 다른 원전의 폐기를 주장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그 누군가를 지지할까요, ‘안전한 원전을 외치는 정부를 지지할까요?

이 딜레마가 천공의 벌전체를 지배하는 주제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원전에 대한 찬반론을 비교적 중립적인 위치에서 조망합니다.

당연히 원전은 이고 원전은 이라는 이분법 따윈 전개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는 없으면 곤란하지만 똑바로 바라보기는 싫은 게 있어.

원전도 그런 것들 중 하나야.”라는 문장은 이런 관점을 잘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전 자체가 가진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그런지,

독자는 천공의 벌을 읽는 내내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원전을 볼모로 삼은 범인을 응원해야 할지,

그 범인을 잡기 위해 분투하는 자들을 응원해야 할지, 말이죠.

 

사실 범인을 잡기 위해 분투하는 자들모두가 원전 세력은 아닙니다.

그들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즉 헬기의 추락으로 원전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쓸 뿐,

원전에 대한 찬반의 철학까지 작가로부터 부여받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심정적으로는 원전에 반대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선 참극을 막아야한다는 사명감으로 바쁘게 움직인다고 할까요?

독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깊이 이입되어 이야기를 따라가게 됩니다.

 

더불어, 마지막 장까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범인들의 의도입니다.

일찌감치 정체를 드러낸 범인들은 아무리 봐도 원전의 투사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투사로 설정됐다면 이야기의 힘도 떨어지고, 뻔한 블록버스터에 머물렀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원자로는 인류에게 미소를 보내는가 하면 송곳니를 드러낼 수도 있다.

미소만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침묵하는 군중이 원자로를 잊도록 해서는 안된다.”

라는 메시지를 통해 범인들의 캐릭터와 의도를 훨씬 고급스럽게설정하고 있습니다.

 

원전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꽤 많이 등장하지만 그리 골치 아프진 않습니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금세 완독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히가시노의 작품답게 쉽고 간결한 문장들과 선명한 캐릭터로 이뤄져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적잖이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유 때문에 얕고 가볍게 읽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히가시노 작품의 특징이긴 하지만,

(또 이 작품이 거의 20년 전에 집필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좀더 묵직한 여운이 남았더라면 작품의 의미가 더 커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런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이야기를 (과할 정도로) 급하게 마무리한 것도

아쉬움을 남기게 한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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