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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파수꾼
켄 브루언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월
평점 :
이 작품을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라 지칭한 출판사의 소개글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아일랜드, 하면 떠오르는 어딘가 불온하거나 음울한 기운이 작품 전반에 녹아있고,
주인공 잭 테일러의 캐릭터는 냉소적이다 못해 신랄하기까지 합니다.
얄미울 정도로 톡톡 쏴대는 비아냥 섞인 말투는 상대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주지만
독자에겐 짜릿한 승리감 같은 기분을 선사하여 이내 호감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조금은 수다스럽고 경망스럽기도 한 잭 테일러를 정통 하드보일드 캐릭터로 볼 순 없지만,
그의 언행이나 그가 처한 환경,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지켜보면
묘하게도 ‘알코올중독에 걸린 필립 말로’가 연상되곤 합니다.
누아르라는 부분 역시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는데,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분명 그런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문장 하나하나, 챕터 하나하나를 뜯어놓고 생각해보면
과연 누아르라 불릴 만한가, 라는 점에서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초반부는 경쾌한 속도감과 함께 잭 테일러의 매력이 마구마구 발산됩니다.
냉소와 비아냥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여자라면 무조건 들이대고 보는 한량 기질,
고위공직자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엿 먹이는 과도한 정의감,
술에 관대한 아일랜드 경찰마저 두 손 들게 만드는 두주불사,
그리고 결국 술로 인해 웬만해선 잘리지 않는다는 아일랜드 경찰에서 쫓겨난 뒤
단골 술집에서 의뢰인을 찾는 사립탐정이 된 발군의 반골 캐릭터가 잭 테일러입니다.
그런 그에게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달라는 미모의 의뢰인이 찾아옵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는데,
왠지 이야기는 자꾸 외곽으로만 돌뿐, ‘탐정 잭 테일러의 활약’은 좀처럼 전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잭 테일러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늘어나고,
사건은 점점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알코올중독의 진창에서 잠시 헤어났다가 다시 그 진창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어딘가 수상쩍기만 한 잭의 술친구 서튼,
딸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면서 잭과 묘한 관계로 발전하는 의뢰인 앤,
길거리 노숙자면서 잭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패드릭,
잭에게는 큰형 또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술집 바텐더 숀 등
잭의 주변은 어딘가 음흉하거나 묘하거나 이방인 같은 존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들었던 생각은
이 작품이 스릴러 또는 출판사 소개대로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라는 장르물이라기보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연상 시키는 작품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경찰에서 쫓겨난 뒤 푼돈 수준의 수임료로 사건을 맡아 생계를 이어가고,
그나마 안식을 주던 집에서도 주인에게 쫓겨나는가 하면
힘겹게 끊은 술의 유혹에 다시 넘어가 폐인이 되기를 자처한 끝에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는 지경에 이릅니다.
물론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주인공 니콜러스 케이지가
죽기 위해 술병을 들고 라스베가스를 찾는 것과는 반대로
잭은 살기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으로 갈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와 분위기는 ‘냉소적인 잭’이라는 차이점만 빼곤
거의 비슷한 느낌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스릴러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었는지
개인적으론 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작품이었지만,
켄 브루언이 창조한 잭 테일러 이야기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11편이나 집필된 걸 보면
이후 잭이 알코올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탐정이 됐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제 첫 편이 소개된 터라 앞으로도 국내에 후속작들이 계속 소개될지 모르겠지만
잭 테일러가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며 좀더 사건에 집중하는 탐정으로 활약한다면
첫 편에서의 아쉬움을 털어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켄 브루언의 대표작 ‘런던대로’를 오래 전 구매해놓고 책장에만 고이 모셔두고 있었는데,
‘밤의 파수꾼’으로 첫 인연을 맺었으니, 이제 조만간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