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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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피 냄새에 잠에서 깬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에겐 늘 피비린내가 먼저 찾아온다.

유진은 매일 먹어야 하는 ''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늘 그랬듯이 약을 끊자 기운이 넘쳤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안과,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된다.

(출판사 책 소개글 인용)

 

● ● ●

 

정유정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 독자라면

이 작품의 정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원고 형태로 읽었더라도

금세 .. 정유정이겠군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처럼 세고, 독하고, 불편합니다.

특히 종의 기원이라는, 어딘가 음모론적인 냄새를 풍기는 제목은 평범한 진화이상의 것,

즉 피로 얼룩진 진화에 관한 이야기라고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26살의 청년 한유진은 어머니와 이모라는 두 여자의 궁둥이에 깔린 방석처럼 살아왔습니다.

의사인 이모는 7살의 유진으로부터 평범하지 않은 면모를 발견했고,

어머니는 이모의 강요(?)에 의해 유진의 성장기를 전방위적으로 통제해왔습니다.

간질 발작을 억제하는 약 때문에 유진의 삶은 엉망인 채 영위됐고,

어릴 적 가족 여행 때 아버지와 형을 잃은 상처는 내내 그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탈출구, 즉 수시로 옥상의 비상계단으로 빠져나가

미친 듯 거리를 달리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해방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깊숙한 곳에 내재돼있던 의 기운을 발견합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피웅덩이 속에서 발견한 어머니의 시신을 처리하며

유진 스스로 누가?’, ‘?’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는 현재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어머니의 일기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과거사를 회상하는 것이 또 한 축입니다.

그 과정에서 현재와 과거에 걸쳐 수많은 피의 향연이 벌어지고,

유진은 때론 긍정하고, 때론 부정하거나 분노하며 자신의 진화에 혼란을 느낍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 예전의 작품들에서 이 조연에 머물렀다면

악의 기원에서의 은 주연의 자리에 등극하여 좀더 강한 이입감을 전해줍니다.

작가는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기 위해라고 1인칭 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작가의 의도대로 주체로 설정된 은 예전의 객체였던 들과는 무게감이 전혀 다릅니다.

 

다만, 두 가지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는데,

우선은 전작들에 비해 정유정 식 스토리텔링이 파괴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심플하게 이야기하자면 의도에 너무 힘을 준 스토리가 힘을 얻지 못했다고 할까요?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라든가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변화해가는 과정, 즉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는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의도에 함몰되어 독자들이 기대한 정유정 식 스토리의 재미가 반감됐다는 느낌입니다.

결과적으로, 주인공 유진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너무 많은 분량이 할애됐고,

그 때문에 지금껏 정유정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지루함이

몇 번씩이나 거듭되곤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의도 자체에 대한 애매모호함인데,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는 의도와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라는 의도가 상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 즉 한유진의 악은 타고난것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천천히 복기해보면 작가는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

, 어떤 계기로 내재된 이 발현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작품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었고,

그래서 어딘가 위화감 또는 애매모호함이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종종 유진에게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을 부여하곤 하는데,

어쩌면 이런 모호함 유진의 이 타고난 것인지 발현된 것인지 을 뭉뚱그리기 위한

일종의 의도적 장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정유정의 작품이라 반갑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아쉬움도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독자들이 기대했던 정유정 작품의 미덕 세고, 독하고, 불편한 정서 은 살아있지만

손에 진땀나게 하는 극강의 스토리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독자의 지나친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곳곳에서 전작보다 심오하게 을 다뤄야 한다는 부담감이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정유정의 신작이라면 언제든 무조건 찾아 읽겠지만

그녀만의 스토리텔링의 힘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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