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지방 소도시의 대형 슈퍼마켓 보안책임자 히라타 마코토는

어느 날 물건을 훔치는 이십대 여성 스에나가 마스미를 붙잡는다.

평소라면 이유 불문하고 바로 경찰에 넘기겠지만,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웬일인지 마음이 움직여 좀도둑을 눈감아주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서로의 마음속 얘기를 털어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을 잇는 운명의 실타래는 잔혹한 결말로 치닫는데...

(출판사 책소개를 수정, 인용하였습니다)

 

● ● ●

 

우타노 쇼고의 작품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많은 선입관을 줍니다.

아마 그중에서도 반전이 끝내주는 미스터리라는 기대 섞인 선입관이 가장 클 것입니다.

번역하신 권남희 님의 후기를 보면 이 작품의 일본 원서 띠지에는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라는 자극적인 카피가 있다고 합니다.

우타노 쇼고의 반전 섞인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킬 대목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기대감에 고양된 독자들에겐 약간의 배신감(?)만 던져줄 뿐입니다.

중후반부까지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는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은 뒤

허무감에 빠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의 자조 섞인 독백 같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디쯤인가부터는 우타노 쇼고의 진면목이 등장할 것 같은데

분량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까지도 도무지 반전과 미스터리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원서의 띠지대로 마지막 5페이지를 남겨놓고서야 우타노 쇼고 식 반전이 급전개됩니다.

다만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점이라면 깔끔하게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아니라,

마음을 무척이나 착잡하게 만드는 양날의 검 같은 반전을 선사했다는 점입니다.

우타노 쇼고 스스로도 인터뷰를 통해 이 특이한 반전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어느 쪽일 수도 있는 결말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저의 감정 역시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합니다.

저는 즐거운 것일까요, 두려운 것일까요?”

 

과거의 비극에 얽매여 현재를 포기한 채 살아가는 중년 남자가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딸 또래의 여자를 만나 잠시 온기를 회복하지만,

그 애틋한 인연이 우연과 운명에 의해 악연으로 변질된다는 스토리는

사실 상투적이다 못해 평범하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클리셰입니다.

하지만 우타노 쇼고는 거기서 딱 한발을 더 나아갑니다.

, 독자들이 .. 그렇게 된 스토리군.’하며 마음을 놓을 즈음

예상 밖의 전개를 통해 뒤통수를 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어느 쪽도 옳다고 할 수 없는 딜레마를 툭 던져놓은 채 이야기를 마무리함으로써

독자에게 깊고 진한 여운을 남겨놓습니다.

그제야 , 우타노 쇼고답군!’이라는 안도(?)가 천천히 밀려들어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책을 막 덮었을 때보다 하루나 이틀쯤 지난 뒤에

진짜 여운과 먹먹함이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비밀과 거짓말, 오해와 회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등

히라타와 스에나가를 힘들게 한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내 가까운 사람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면서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 중 집의 살인 시리즈밀실살인게임등의 미스터리보다

늘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을 좋아하는데,

담백하거나 또는 심연 같이 어두운 사람의 마음을 잘 포착한 서사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역시 좋아하는 목록 상단에 오르긴 하겠지만,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앞부분의 장황하고 중복되는 묘사를 줄여

중편 정도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더 단단한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꽤 오랫동안 책장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마침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지는 가을에 읽은 덕분에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우타노 쇼고의 반전이 끝내주는 미스터리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독자들을 위해

번역하신 권남희 님의 후기 중 한 대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에 대한 아무 선입견 없이, 작품에 대한 희망사항 없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운 상태에서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띠지의 카피 따위 당연히 무시하고.

나는 (중략) 우타노 쇼고에 대해 아직 그닥 정통하지 않아서인지,

뭐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이 다 있나 하며 진심으로 즐겁게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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