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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네의 탄환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환자들의 하소연 들어주기’가 주된 업무인 도조대학병원 신경내과의사 다구치 고헤이는 언제나처럼 다카시나 원장의 꼬임에 넘어가 신설되는 Ai(사후 화상 진단)센터의 센터장으로 임명된다. 방사선을 통한 사체 훼손 없는 해부 방식인 Ai를 도입하자는 취지로 설립되는 Ai센터.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은 도조대학병원에 위협을 가하며 음모를 꾸민다. 그러던 중 병원 내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다카시나 원장이 뇌물 수수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다구치의 초대로 Ai센터 옵서버로 참여한 후생노동성 서기관 시라토리는 다구치를 도와 Ai센터를 무력화하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의 음모를 밝혀내는 것은 물론 살인사건의 진상과 진범 찾기에 앞장선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일본출간 기준)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가이도 다케루의 작품은 (이 시리즈가 아닌) ‘나니와 몬스터’였는데, 관료체제와 사법기관에 대한 작가의 과도한 증오심과 ‘의료입국’에 관한 혁명적이고 무모한 이상론에 심하게 질렸던 터라 도조대학병원 무대로 한 다구치-시라토리 콤비의 신작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나이팅게일의 침묵’, ‘제너럴루주의 개선’으로 이어진 시리즈는 메디컬과 미스터리가 매끄럽게 조합된 매력적인 이야기들이었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부분이 가장 기대된 게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작품은 기존의 다구치-시라토리 콤비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에 ‘나니와 몬스터’의 주제인 ‘의료입국’ 및 ‘사법에 대한 의료의 우위’가 혼재된 이야기입니다. 즉, 가이도 다케루는 의료체계를 자신들의 발밑에 두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투명하고 공정한 사인 검사를 위해 Ai라는 독립된 시스템을 강조합니다.
양측의 입장을 요약하면, 경찰과 사법기관은 자신들이 관장하는 ‘메스를 이용한 사법 해부’가 최우선이며, 도조대학병원의 Ai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되 반드시 경찰이 통제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하지만 도조대학병원은 사법 해부가 경찰의 입맛에 맞게 조작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메스 없이도 사인을 밝힐 수 있는 Ai를 병원이 독립적으로 관할해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그 과정에서 도조대학병원과 Ai시스템을 붕괴시킬 계획을 세운 경찰 내 과격파는 Ai센터 준비위원회에 부센터장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음모를 진행시킵니다. 한편, Ai센터장인 다구치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시라토리를 비롯하여 Ai시스템의 능력자들을 병원으로 끌어들이지만 병원 내에서 연이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위기에 봉착합니다.
‘의료와 사법의 갈등과 대립’이 전반부라면, 시라토리가 이끄는 미스터리 해법이 후반부인데 분량상으로도 딱 1/2씩 할애됐습니다. 말하자면 전반부는 ‘나니와 몬스터’의 재판(再版) 같았고, 후반부는 앞선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전형이었습니다.
경찰의 통제 하에 이뤄지는 메스를 통한 사법 해부와 의료진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용되는 Ai 간의 논쟁은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고 정의에 가까운지 판정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작가의 노선은 너무나도 명확해서 경찰과 사법기관을 ‘惡’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독자 입장에선 때론 경찰과 사법기관의 주장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때론 경찰의 통제를 벗어난 Ai가 정의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속도감과 긴장감을 겸비했고, 밀실과도 같은 MRI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끝까지 진상을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주인공 다구치가 상대적으로 무력해 보인 점만 빼곤 캐릭터의 매력 역시 생생했습니다. 시라토리의 괴물 같은 추진력과 추리는 전광석화와도 같았고, 다구치가 끌어들인 Ai 진영은 소위 능력자들로 구성된 ‘지구방위대’ 같았습니다. 덕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한나절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니와 몬스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 ‘의료 對 사법’의 과도한 갈등 묘사 때문에 애초의 기대감이 제대로 충족되진 못한 게 사실입니다. 물론 병원 내에서 벌어지는 암투나 갈등에 머물지 않고 첨예한 사회적 문제를 끌어들인 가이도 다케루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어딘가 다분히 작위적인, 그래서 목적극 같은 냄새가 진하게 풍겼기 때문입니다. 또, 앞서 언급한대로 Ai 시스템이 왜 필요하며, 왜 사법 해부보다 정의로운 방법인지에 대해 독자를 완벽하게 설득하지 못한 점은 초반부의 책읽기를 난해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전 작품들에 비해 그 캐릭터가 왜소해진 다구치가 안쓰러웠고, 시라토리의 추리는 슈퍼울트라 급으로 폭주한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두 주인공이 너무 극과 극의 위치에서 이야기를 끌어갔다고 할까요?
아마도 가이도 다케루의 신작이 나온다고 하면 여지없이 찾아 읽을 것 같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조대학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병원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삼는 것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이젠 가이도 다케루가 경찰 및 사법기관과 더는 각을 세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