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조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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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사사키 조의 경찰소설이지만 별 세 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줬습니다. 약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있으니 감안하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사키 조의 대표작 경관의 피’, 9년 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경찰소설의 대가답게 이번에도 사사키 조의 문장은 거침없으면서도 사실적이고 독자의 몰입감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힘을 발휘합니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명확한 캐릭터와 역할을 지니고 있어서 굳이 정리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됩니다.

주인공 안조 가즈야의 캐릭터나 안조 가문 3대에 걸친 경관의 내력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전작인 경관의 피를 먼저 읽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작가는 그런 수고 없이도 안조 가즈야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여러 가지 정보와 설명을 제공합니다. 이야기는 경관의 피마지막 장면이 다시 한 번 리플레이 되면서 시작됩니다.

 

문제 경찰을 내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조사를 진행해온 안조 가즈야는 고민 끝에 자신의 상관이자 전설적인 조폭 전문 형사 가가야 히토시를 상부에 고발합니다. 결국 가가야는 제복을 벗고 시골로 내려가 낚싯배를 운영하며 살아갑니다. 9년이 지난 현재, 도쿄의 각성제 판매 양상이 급변하면서 경시청에 비상이 걸립니다. 조직범죄대책부 1과 계장이 된 가즈야는 업무가 겹치는 5과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각성제 시장의 혼돈을 수사하던 중 불의의 사고를 일으킵니다. 이를 계기로 정보 수집의 한계를 느낀 경시청은 가가야를 5과의 계장으로 복직시킵니다. 가즈야의 1과가 난맥상처럼 꼬인 정보 탓에 헤매는 동안 5과는 가가야의 활약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1과를 압도합니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절정부에 이르러 가즈야와 가가야는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3대 경관이라는 타이틀이 명예이면서 동시에 트라우마인 안조 가즈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듯 평탄치 못한 경찰의 길을 걷습니다. 이른 나이에 승진시험에 통과하여 경부가 된 영광도, 조직범죄대책부의 계장에 오른 기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할 만큼 따가운 눈길에 휩싸입니다. 누군가는 그의 영광과 기쁨이 선대의 후광이라고 시기하고, 누군가는 그가 상사였던 가가야를 고발한 대가로 그 영광과 기쁨을 누린다고 비난합니다.

 

독자를 가장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은 9년 전 가즈야의 고발로 제복을 벗었던 가가야가 그를 내쳤던 경시청의 간청에 의해 복직을 결심하는 장면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복직 시점은 가즈야가 최대의 위기에 빠진 때였고, 두 사람은 9년 만에 라이벌인 1과와 5과의 계장으로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가즈야가 아직 새내기 계장으로 정보 수집에 애를 먹는 반면, 가가야는 복직과 동시에 거물들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과시합니다. 이래저래 독자들이 기대하던 최고의 빅 매치가 성사된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 밀려든 아쉬움이 너무 컸다는 점입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왜 이 작품에 경관의 조건이라는 제목을 달았는지, 굳이 안조 가즈야의 9년 후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그릴 필요가 있었는지 약간의 실망과 적잖은 허탈감까지 느꼈습니다. ‘경관의 피3대라는 장구한 시간 속에 벌어졌던 사건들과 함께 경찰로서의 자부심과 고뇌, 부자간의 갈등과 화해 등을 극적으로 그려냈다면, ‘경관의 조건은 단지 사건에만 매몰된 작품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즈야의 위기와 가가야의 복직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변곡점입니다. ‘경관의 피에서 미처 다 그려지지 못한 두 사람의 갈등, 즉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면 어둠의 세력들과 공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가가야와, 경찰의 본분과 정도를 지키기 위해 상사를 고발했던 가즈야의 갈등이 9년 만의 재회 이후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가 너무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갈등은 개인적인 부분도 있지만, 경관의 조건에 대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설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사키 조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 사건에 올인한 나머지 정작 가즈야와 가가야의 갈등을 (제대로 된 충돌 한 번 없을 정도로) 이야기의 주변부로 몰아냈습니다. 적어도 후반부엔 한번쯤 두 사람의 충돌이 세고 진하게 묘사되리라 기대했지만 사사키 조는 엉뚱한 사건과 인물들에게 분량을 할애하면서도 정작 두 사람의 정면 대결은 엔딩에 이르기까지 회피했습니다. ‘경관의 피3대에 걸쳐 경관이 가야할 길, 경관의 도덕과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경관의 조건은 동시대에 서로 다른 도덕과 가치관을 지닌 두 경찰의 이야기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경관의 조건이라는 제목도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아닐까요?

 

기대가 컸기 때문에 아쉬움도, 실망도 컸던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서점의 서평을 살펴봤더니 대부분 호평 일색입니다. 어쩌면 제가 잘못 읽은 탓일 수도 있지만 경관의 피가 선사했던 거대한 서사의 힘을 경관의 조건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작의 성공에 편승한 후속작이라는 혹평이 더 어울려 보였습니다. 사사키 조가 경찰소설의 대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 관해서만큼은 제목도, 주제도 그답지 않았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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