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평점 :
본격+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에 대하급 경찰소설의 매력까지 지닌
찬호께이의 국내 첫 소개작 ‘13.67’의 열혈독자라면
저처럼 ‘기억나지 않음, 형사’에서도 비슷한 매력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 상 수상’이라는 이력에서 예감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서사보다는 정교한 플롯과 연이은 반전을 앞세운 독특한 작품입니다.
또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기억’이라는 조금은 미묘한 ‘정신의 영역’을 끌어들임으로써
앞선 ‘13.67’의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 ● ●
홍콩 경찰 쉬유이는 어느 날 아침 숙취와 함께 잠에서 깹니다.
부부살인사건을 수사하던 그는 어제까지만 해도 2003년을 살고 있었지만
잠에서 깬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2009년입니다.
무려 6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것입니다.
그가 수사하던 사건은 이미 종료된 상태였고, 용의자는 차량사고로 사망한 상태입니다.
그는 엉겁결에 여기자 루친이와 함께 당시 피해자의 유족 취재에 동행하게 되는데,
사망한 용의자가 진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위화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만 하루 동안의 조사를 통해 쉬유이는 나름 진상을 파악해내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반전과
사라진 6년간의 기억 속에 숨어있던 기가 막힌 진실이었습니다.
● ● ●
보통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의 경우 대표작(가장 대중적인?)부터 먼저 출간된 뒤
그 반응에 따라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 또는 데뷔작이 출간되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처음 소개된 대표작에 비해 조금은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의 경우 실망감까지 느낀 것은 아니지만
비장하고 스케일이 큰 경찰 서사를 기대했던 터라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고 할까요?
하지만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통해 찬호께이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분명 그만의 독특한 필력과 구성이 가진 매력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경찰의 인생을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하여 더 큰 울림을 전해줬던 ‘13.67’도 그랬지만
이야기 자체만큼이나 구성이 갖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찬호께이는 이 작품을 통해 또 한 번 입증하고 있습니다.
기억상실에 걸린 쉬유이가 만 하루 동안 진실 찾기에 나선 동안
찬호께이는 소챕터들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과거를 조금씩 떡밥처럼 소개합니다.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독자는 묘한 위화감과 이물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 느낌은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까지 계속 독자를 괴롭힙니다(?).
특히 논리적으로는 100% 설명하기 어려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기억상실이 개입되어
독자의 ‘즐거운 괴로움’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배가됩니다.
사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기억상실은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소재로 여겨지지만
찬호께이는 쉽게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미스터리의 구조 속에
이 진부한 소재들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고 녹여냈습니다.
쉬유이의 사라진 6년의 기억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독자는 “아, 이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물론 파격적인 마지막 반전과 약간은 장황하게 설명된 ‘기억’에 관한 과학적 지식에 대해
일부 독자는 공감하기 어려워할 수도 있고 작위적이라고 평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미묘하기 이를 데 없는 ‘뇌와 정신의 영역’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어떤 부분에서는 끼워 맞추기 식 해설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런 약점들이 작품 전체의 미덕을 훼손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뭐랄까, 조금은 무모하지만 새로움을 앞세운 신선한 실험작의 장점이 더 살아있다고 할까요?
또, 그런 부분이 높게 평가받아 시마다 소지의 극찬을 이끌어낸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찬호께이의 다음 출간작이 어떤 작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두 편의 작품만으로도 국내에 그의 후속작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많아졌으리라 여겨집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13.67’에 맞먹는 대하급 경찰소설이기를 기대하지만,
‘기억나지 않음, 형사’처럼 파격적인 내용과 형식의 작품이라도 기꺼이 환영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