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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6월
평점 :
1985년 여름, 한 남자가 여섯 여자와 집단자살을 한다.
남자는 1년 동안 열 명의 살인에 관여한 기우라 겐조.
여자들은 그의 밑에서 일하던 매춘부였다.
기우라가 벌인 살인과 집단자살은 3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스무 명에 달하지만 제대로 된 증언은 거의 없다.
한 저널리스트가 진상을 밝히기 위해 사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고,
30년 전 악몽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여성의 행방을 좇는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온 충격적인 진실은?
(책 뒷표지에 실린 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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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도쿄대를 졸업한 앞날이 창창한 젊은 국립대 교수,
야쿠자 두목의 딸인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만기 출소한 뒤 매춘알선업으로 성공한 사업가,
열 명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여섯 여자를 동반자살하게 만든 끔직한 살인마,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과 경외감을 동시에 갖게 만드는 무적의 카리스마...
이 모든 것이 기우라 겐조라는 한 남자의 캐릭터입니다.
언뜻 보면 다중인격자인가 싶을 정도로
한 인물의 캐릭터라 하기엔 상반되고 극단적인 모습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수많은 끔찍한 사건들을 저지른 이 기이한 인물의 심리와 동기에 대한 의문이
이 작품의 모티브이자 주인공인 저널리스트의 취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저널리스트는 아직 생존해있는 당시 수사관들이나 목격자를 인터뷰하며 취재노트를 만듭니다.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 형식으로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그래서 취재노트와 소설이 한 챕터씩 번갈아 등장하는데, 구성의 재미를 위해서인지
‘떡밥을 먼저 던져놓고 그것을 천천히, 긴장감 있게 풀어 보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생존자들의 진술을 통해 기우라의 성장 과정과 그가 겪은 우여곡절들을 설명하지만,
사실 이런 설명들을 다 읽고도 기우라의 캐릭터와 동기를 100%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오히려 계속 “왜?”라는 질문을 증폭시킬 따름입니다.
왜 그는 명문대 출신의 국립대 교수면서 야쿠자의 딸과 결혼했을까?
왜 그는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해놓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수형 기간을 채웠을까?
중년의 나이에 만기 출소한 뒤 (가업이긴 해도) 매춘알선업에 나선 것도 이상하지만,
도쿄로 진출하여 자리를 잡기 위해 무수한 목숨을 잔인하게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충분히 살아남거나 도망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왜 집단자살이라는 선택을 한 것일까?
작가는 상투적인 방법, 즉 성장기의 트라우마나 부모의 학대 등으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인격이 삐뚤어지기 시작했다는 식의 뻔한 코드를 거부합니다.
물론 유일한 생존자인 한 여자의 진술을 통해 그의 충격적인 개인사가 밝혀지긴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끔찍하게 일그러진 캐릭터의 근원으로 설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왜?”에 대한 선명한 대답을 얻진 못합니다.
심지어 번역하신 이선희 님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물음표로 시작해서 물음표로 끝난다는 점이다.”라고 서술합니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설명되는 엔딩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겐 분명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우라의 삶 가운데 어떤 순간, 어떤 사건, 어떤 인물이
그를 그토록 불가지한 인격으로 만들었는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줬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한참동안 적잖은 여운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 작가가 작위적으로라도 ‘그의 트라우마’를 설정했더라면
마지막에 이르러 무척이나 김빠지는 작품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입니다.
마에카와 유타카의 국내 첫 출간작 ‘크리피’도 좋은 평을 들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작품 정도의 완성도라면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리라는 기대가 듭니다.
무엇보다 캐릭터를 구축하고 끌고 가는 힘만큼은 여느 기성작가 못잖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