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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잠 ㅣ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사진작가 다쓰미 쇼이치는 폐허가 된 호텔 촬영을 위해 쇠락한 소도시 다카하마를 찾았다가
공항건설 반대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린 다쓰미는 과거 잠시 탐정 일을 했던 경험을 발휘하여
현지 신문기자이자 피해자의 남편인 안비루와 함께 진상 파악에 나섭니다.
하지만 공항건설을 둘러싼 찬반파의 갈등으로만 보이던 사건은 캐면 캘수록 복잡해졌는데,
폐쇄적인 소도시 특유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속내를 알 수 없는 관련 인물들의 태도는 물론,
살인사건과 연관 있는 것으로 보이는 5년 전의 호텔 방화사건, 조직폭력단의 은밀한 개입 등
사건의 외연을 키우는 변수들이 시간이 갈수록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쓰미의 조사가 장벽에 막혀 지지부진할 무렵,
또 다른 희생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소도시 다카하마는 패닉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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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자’ 이후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난 가노 료이치의 작품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두 작품은 비슷한 얼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주인공(변호사, 사진작가)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가 하면,
폐쇄적이고 쇠락한 소도시의 개발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과거의 사건이 마치 나비 효과처럼 현재의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이젠 곳곳에 폐허만 남은 바닷가의 소도시에서
유년기부터 함께 성장해온 주민들은 공항건설 계획을 둘러싸고 극단적으로 대립합니다.
이들은 복잡한 애증 관계로 얽혀있지만 동시에 비밀을 공유한 사이이기도 합니다.
다쓰미는 공항건설을 둘러싼 주민들 간의 갈등에 주목하면서도
5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호텔방화사건이 사건해결의 열쇠라고 확신하지만
소도시 주민 누구도 그에게 당시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비밀은 치명적인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다쓰미처럼 외부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사건해결에 앞장 설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도 외부인 다쓰미에게 소도시의 비밀을 쉽게 털어놓지 않습니다.
‘창백한 잠’이 독자를 끝까지 긴장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스터리도 미스터리지만 가노 료이치는 폐쇄적인 소도시 특유의 분위기,
즉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도시 주민들 사이의 애증과 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다치게 할 수 있는 비밀을 공유하는 일그러진 유대감 등을
살인, 실종,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사건 속에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쓴 다쓰미의 탐문이 밝혀낸 사건의 진상 역시
이런 다카하마의 특별한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환상의 여자’와 비슷한 얼개를 지녔다고 언급했는데,
공교롭게도 아쉬운 점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노 료이치는 다쓰미의 개인사, 즉 일찌감치 붕괴된 가족의 트라우마를 비중 있게 다루는데
이 대목을 다카하마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연결 짓는 과정에서
조금은 무리하게, 또 약간은 과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건에 휘말린 다쓰미의 심리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그의 개인사를 소개한 것인데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환상의 여자’에서는 주인공의 개인사가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차지했던 것이 아쉬웠는데,
‘창백한 잠’은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이라 크게 거슬리진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주인공의 천재적이고 비약적인 추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부분입니다.
‘환상의 여자’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때 서평을 인용하면,
독자들이 따라잡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스모토의 추리가 폭주합니다.
한 장의 사진과 한 줄의 진술을 통해 “진상을 알 것 같다.”는 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충분한 단서나 개연성이 제공되지 않은 채 방대한 진실을 설명하는 스모토의 추리는
몇 번을 되읽어도 ‘왜 저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이해하기 힘들 만큼 홀로 앞서갑니다.
다쓰미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습니다.
물론 작가는 다쓰미가 어떤 근거로 그런 추리에 이르렀는지 부연 설명을 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잠시 탐정 일을 경험했을 뿐, 본업은 사진작가’라는 다쓰미가
어지간한 명탐정보다 더 뛰어나게 느껴진 것은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가노 료이치의 가장 큰 미덕은 도저히 풀 수 없어 보이는 복잡한 실타래를
주인공이 끈질기고 집요하게 한 가닥씩 풀어가도록 정교하게 설계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의 ‘폭주와 비약’만 아니라면 그 정교한 설계에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늘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그의 작품을 기다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설정 속에 개인의 욕망을 녹여내는 가노 료이치의 공식이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형식과 스토리로 발휘될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