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사라바는 아쿠스 아유무라는 한 남자의 30여년에 걸친 성장기이자

동시에 한 가족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해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얽매인 탓에 깊은 사랑과 더 깊은 증오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네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소심, 진지, 정직, 포용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어딘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아버지,

이기심과 허영, 강고한 의지로 똘똘 뭉친 대찬 성격의 어머니,

모두에게 주목받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유년기부터 온갖 엽기적인 행동과 가출, 등교 거부 등으로 온 가족을 힘들게 만들었던 누나,

그리고 좋게 말해서 중용, 실제로는 눈치와 방관이라는 처세술을 통해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하며 살아온 나, 아쿠쓰 아유무.

 

네 사람이 이룬 아쿠쓰 가()30여년의 스토리는 사실 막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쉼 없이 부딪히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자신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생활은 느닷없는 균열로 무너지기 시작했다가 결국 파국을 맞았고,

엽기적인 누나와 자존감 강한 어머니 간의 극단적인 충돌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어머니는 이혼한 아버지가 보내준 돈으로 무위도식하면서도 상대를 바꿔가며 연애에 빠졌고,

시한폭탄 같던 누나는 어느 날 갑자기 종교에 귀의하면서 더욱 기괴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유무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적당히 방관자 역할을 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편임을 유년기부터 깨닫습니다.

필요에 따라 귀여움과 애교를 떨면 아버지나 어머니는 자신의 우군이 돼준다는 것을,

상황에 따라 갈등의 한복판에서 슬그머니 도망치면 누구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갈등에 휘말려도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 자신에겐 피해가 없다는 것을

아유무는 본능처럼 터득하고 자신의 삶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말하자면 남들이 좋아하는, 남들이 싫어하지 않는 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의 의지대로 나의 삶을 설계할 생각 같은 건 해보지도 않은 채 성인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성인이 된 아유무는 한때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유년기부터 취해온 그의 삶의 방편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옵니다.

시간은 괴물처럼 흘러 그를 30대라는 연배에 올려놓았으며,

타고난 외모는 망가지고, 자신만의 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삶은 좌표를 상실합니다.

특히 자신의 존재감을 지탱해줬던 친구들, 언제까지 자신과 함께 할 거라 믿었던 그들이

실은 다들 자신만의 인생을 견고히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아유무는 패닉에 빠집니다.

덧붙여 이미 해체됐던 가족의 공습이 다시 시작되면서

아유무는 문득 지나온 자신의 30여년의 시간을 돌아보게 됩니다.

 

사라바는 가족 이야기지만 끝내 모든 것이 가족으로 귀결되는,

그러니까 가족만이 모든 미덕의 정점이라고 미화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가족의 이면 때론 추악하고, 때론 남들보다 못한 면모 -

아유무라는 한 남자의 성장기와 함께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물론 아유무의 가족은 고통스런 여정을 겪은 후에 나름의 방식으로 봉합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할 뿐입니다.

아유무의 가족에겐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으며

새로운 고통과 갈등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유무와 그의 가족의 30여년을 지켜본 감회는 독자가 어떤 세대냐에 따라 퍽 다를 것입니다.

10, 20, 30, 그리고 그 이상의 세대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읽힐 작품이란 뜻입니다.

내게 다가올 시간, 내가 지나고 있는 시간, 내가 떠나보낸 시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공감과 저항, 회한과 외면 등의 감정이 세대마다 특별하고 색다르게 떠오를 것이고,

지금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시선도 세대마다 달리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1,2권에 걸쳐 9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에 담긴 아유무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극적인 재미나 속도감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담담한 작품이라

자극적인 이야기에 길든 독자에겐 때론 지루함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론 작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약간은 강요처럼 느껴지는 대목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누군가의 가족의 이야기를 엿봄으로써

지금 나의, 내 가족의 민낯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미덕은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라는 사라바의 가장 큰 미덕이자 주제가

제겐 오히려 부담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오히려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라는 컨셉과

그것을 담담하게 풀어간 서사 그 자체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이야기가 내내 아유무의 1인칭 시점으로만 전개됐다는 점인데,

개인적으론 한 챕터씩 번갈아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기술됐다면

훨씬 더 다양한 감정들을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워낙 극과 극의 정서들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라 그들 역시 할 말이 무척 많았을 것이라는,

그래서 같은 상황이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설명됐더라면

아유무 가족의 이면을 좀더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 사라바(サラバ).

안녕을 뜻하는 아라비아어 맛살라마와 일본어 사라바(さらば)’

아쿠쓰 아유무가 이집트에서 살던 유년 시절의 절친 야곱과 함께 멋대로(?) 조합한 단어.

내일도 만나자’, ‘약속이야’, ‘굿럭’, ‘갓 블레스 유’, ‘우리는 하나야등의 의미를 가졌지만

단순히 그 의미를 넘어 힘들 때나 그리울 때, 기쁨을 공유하거나 슬픔을 나눌 때,

타인 혹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을 때 무심결에 입에 담게 되는 일종의 주문 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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