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 인간실격.제로자키 히토시키, Faust Novel ㅣ 헛소리꾼 시리즈 2
니시오 이신 지음, 현정수 옮김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시리즈 첫 편인 ‘잘린 머리 사이클’이 기이한 캐릭터들로 가득 찬 독특한 작품이긴 했어도
절해고도에서 벌어진 밀실살인사건의 진상 밝히기를 다룬 ‘제대로 된’ 미스터리였다면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는 화자인 나, 헛소리꾼 이짱의 ‘정신세계 해부’에 중점을 둔 반면
연쇄교살사건이라는 미스터리 코드는 상대적으로 서브 스토리처럼 다뤄진 작품입니다.
이짱의 주변에서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제로자키라는 길거리 살인마에 의한 무차별 토막 살인사건이 하나이고,
같은 과 여학생 미코코를 통해 알게 된 동급생들이 연이어 교살되는 사건이 또 하나입니다.
사실 이짱이 진실 찾기에 나서는 메인 스토리는 후자이고,
제로자키라는 잔혹한 살인마는 이짱의 정신세계 해부를 위한 소품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처음 등장한 ‘잘린 머리 사이클’에서의 이짱은 제법 평범한 캐릭터였던 걸로 기억하지만,
이 작품 속의 이짱은 그야말로 소시오패스의 전형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실천합니다.
소시오패스라고 해서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이짱은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도 이입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애정은 말할 것도 없고 혐오는 할지언정 증오는 하지 않는,
즉 타인과의 그 어떤 커뮤니케이션이나 감정적 교류도 거부하는 캐릭터로 묘사됩니다.
또 여기저기서 모순된 사고와 행동을 하면서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자기변호를 하거나, 심할 정도로 자학에 빠지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니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다며 염세주의의 극단을 달리기도 하고,
매사에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때론 자기도 모르게 사건에 깊이 개입하기도 합니다.
외진 곳에서 만난 길거리 살인마와는 격투 중에 근거 없는 동질감을 느끼는가 하면,
심지어 거울 속의 자신 같다는 공명까지 주고받으며 긴밀한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울증 캐릭터라고 할까요?
미스터리에 비해 턱없이 많은 분량이 할애된 이짱에 대한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묘사들 때문에
독자들은 무수한 현학적 표현과 쓴 사람만 알 수 있는 모호한 표현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면 그동안 묘사된 이짱의 정신세계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굳이 그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길거리 살인마를 소품으로까지 등장시키면서까지
이짱의 소시오패스적인 기질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회의도 듭니다.
오히려 연이어 교살된 이짱의 동급생들의 미스터리에 충실했더라면
훨씬 더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잘린 머리 사이클’은 그런 부분에서 ‘제대로 된’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평들을 살펴보면 ‘잘린 머리 사이클’에 비해 상대적으로 혹평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이 비슷한 이유를 근거로 한 내용들입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2007년에 제다이 님이 네이버 카페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에 올린 서평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세상천지의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 고독하기만 한 이짱의 심리와 헛소리는
비슷한 생각을 품고 사는 십대에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을 거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난 본인 같은 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나는 철저하게 미스터리의 관점에서만 이 작품을 보았고, 사용된 트릭에 충분히 만족했다.
사실은 만화 같은 인물들이나 헛소리를 아예 빼고,
250페이지 내외의 콤팩트한 추리소설로 만들어졌으면 더욱 열광하겠지만...
(http://cafe.naver.com/mysteryjapan/3567)
물론 제다이 님은 여전히 ‘헛소리꾼 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표하면서 글을 마쳤지만,
저는 다음 작품을 계속 읽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입니다.
동급생 연쇄교살사건은 동기는 좀 억지스러웠지만 트릭은 나름 신선했고,
이짱 주변의 기이한 캐릭터들은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매력들을 맛보기 위해 ‘기나긴 헛소리’를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중고로 구매한 ‘헛소리꾼 시리즈’를 다시 중고시장에 내놓을지, 어떻게든 계속 읽을지는
다음 작품인 ‘목매다는 하이스쿨’의 100페이지까지 읽고 결정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