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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조사관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5년 10월
평점 :
국가기관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모델로 한 ‘인권증진위원회’를 무대로
개성 강한 각양각색의 조사관들이 때론 갈등을 겪으며, 때론 협력을 통해
인권지킴이로 분투하며 ‘감춰진 사실’을 밝혀내는 5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얼핏 책 소개만 보면 논픽션의 맛이 나지 않을까, 선입견이 들 수도 있지만
송시우 작가는 조사관들의 고민과 활약을 쫀쫀하고 알찬 미스터리 속에 잘 버무렸습니다.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공권력의 남발,
증거보다 진술에 의존하는 후진적인 사법체계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주제에 잘 어울리는 미스터리 픽션으로 포장하여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전해줍니다.
도처에 숨겨놓은 덫과 복선을 이용하여 막판 반전을 꾀하는 에피소드도 있고,
명쾌하게 답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도 ‘정의감에 사로잡힌 슈퍼울트라 능력자’와는 거리가 먼,
어딘가 한군데씩 부족함을 지닌 지극히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인물들입니다.
조사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정작 인권위 일이 적성이 아니라고 여기는 한윤서,
40대의 아줌마 조사관으로 귀가 얇은 단점은 있지만 추진력만큼은 일품인 이달숙,
막내 조사관임에도 다혈질에, 성차별에, 내심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문제 조사관 배홍태,
사명감 때문에 로펌 대신 인권위에 왔지만 기대한 것처럼 일이 안 풀려 고민 중인 부지훈 등
어느 조직에나 한 명쯤 있을 법한, 드라마로 치면 조연에 가까운 캐릭터들입니다.
전형적인 구성이라면 이들의 갈등을 봉합하고 멋진 결론을 내리는 보스가 나올 법도 한데,
작가는 지시와 보고에만 충실하거나 또는 결정 자체를 떠미는 무력한 상사만 등장시킵니다.
말하자면 조사관들 사이의 갈등을 독자 앞에 고스란히 노출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해서든 작가의 입을 통해서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독자 스스로 각자의 결론을 고민하게끔 만드는 여지를 꽤 많이 남겨 놓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지점이 ‘달리는 조사관’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인권위의 정체성과 본분을 놓고 벌어지는 조사관들 사이의 갈등을 지켜보고 있자면
“현장도 모르고 법도 모르는 비전문가에 의한 조사와 판단은 신뢰할 수 있는가?”
“과연 국가기관은 당연히 감시받아야 할 수상하고 사악한 존재인가?”
“악인의 인권도 보호돼야 하는가?” 등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작품 속에서도 이런 대화들이 숱하게 오갑니다.
“인권은 개잡놈들에 의해 발전돼왔고, 그 혜택은 주로 그 개잡놈들이 누리고 있다.”라든가,
“(엄격한 증거가 없어도) 약자의 편에서 인권침해라는 판단을 팍팍 내려줘야지.”라든가,
“우리 일이 결국 나쁜 사람들 좋자고 하는 일이었네요.”라는 자조 등이 그것인데,
이런 대목을 읽을 때마다 답 없는 딜레마의 답답함과 고민이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미스터리로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의미들을 곱씹어가면서 읽는다면 훨씬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책읽기가 돼줄 것입니다.
이미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통해 크지 않지만 촘촘한 서사의 힘을 보여준 송시우 작가가
기대대로 훌륭한 두 번째 작품을 내줘서 반갑고 또 반갑습니다.
인권 문제와 미스터리의 조합이라는 발상도 신선했고
이야기의 전개나 엔딩 모두 상투적이 않은 방식이라 (개운하진 않지만) 마음에 들었습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 이후 1년 5개월 만에 신작이 나온 셈인데,
시공사 블로그에 실린 “다음 작품은 더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인터뷰 내용대로라면
빨라야 2017년 하반기나 돼야 신작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sigongbook/220547694116)
독자 입장에선 기다린 시간만큼 알찬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