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소도중
미야기 아야코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2006년 제5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제가 장르물 일본소설 가운데 베스트로 꼽는 작품 중 하나인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에 실린 단편 '미쿠마리' 역시 2009년에 이 상을 받았는데, 심사위원이나 선정기준이 아무래도 저와는 궁합이 잘 맞는 문학상 같아 앞으로도 이 상의 수상작에는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연작 형태로 구성돼있는데 표제작인 화소도중(花宵道中)’'아름답게 차려입은 유녀가 꽃이 핀 밤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나머지 다섯 편 역시 모두 이 작품집의 애잔한 정서에 어울리는 소제목들을 갖고 있습니다.

 

에도의 대규모 유곽 요시와라에 자리 잡은 작은 기루 야마다야는 본문에 묘사된 것처럼 좋게 말하면 아담하고 정이 가는, 나쁘게 말하면 가난하고 어정쩡한 느낌의 유곽입니다. 간혹 납치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가난을 견디지 못한 가족들의 손에 의해 팔려온 소녀들이 계약이 끝나는 20대 후반 즈음까지 유녀로서 몸과 웃음을 팔며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녀들의 일은 낮과 밤도 없이, 여름과 겨울의 구분도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누군가가 부르면 늘 달려가야 하고, 누군가가 지목하면 그가 야차라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녀들은 자유의 신분이 될 때까지 유곽 요시와라의 대문 밖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예외라고는, 죽어서 관에 실려 나가거나 목숨을 걸고 몰래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가라고 해도 그녀들은 주저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과 요시와라 유곽 외에 그녀들이 아는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도망치고 싶은 욕망과 바깥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그녀들을 주저앉히고 맙니다.

 

이렇듯 막장 같은 삶을 감내해야 하는 유녀들이 모여든 곳이지만 그곳에도 사랑과 증오, 미운 정과 고운 정, 시기와 질투, 욕망과 절망 등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들과 복잡한 감정들이 산재해있습니다. 누군가를 절절히 사모한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고, 화려한 기모노와 머리 장식을 만끽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즐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캐릭터도 종종 등장합니다. 진상 같은 손님 때문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가 하면, 오래 전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손님으로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여러 에피소드가 전개되지만 이야기의 알맹이는 사랑입니다. 유곽에서는 유녀들이 정부(情夫)를 두는 일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지만 누구나 한 명쯤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두고 사모하는 남자를 갖고 있습니다. 금지된 사랑이기에 오히려 더 절절하고 애틋하지만 그 끝은 대부분 비극입니다. 유곽에 불을 질러 사람들의 이목을 끈 뒤 운 좋게 동반 도주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뤄지지 못한 사랑에 자살을 하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병사하거나, 지키지 못할 공수표만 믿고 있다가 배신당한 끝에 마음의 병을 얻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을 주지 않는 여자가 요시와라에서 출세한다.”는 말이 금언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그녀들은 기꺼이 열병과 후유증을 감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에게 돈을 지불한 남자와 첫날밤을 치러야만 하는 동생 유녀에게 언니 유녀는 이런 말을 건네줍니다.

 

“(첫날밤은)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으로 생각하며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거야.”

 

그렇게라도 자신의 사랑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키우려는 것이 유녀들의 작은 소망입니다. 언니나 동생이 죽어나가도 몸을 팔고 웃음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 소망만이 그녀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고, 무모한 희망이나마 잃지 않게 만들어주는 불씨이기 때문입니다.

 

화소도중은 아주 노골적인 성애소설이 맞습니다. 하지만 민망할 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된 은 오히려 그녀들을 애잔하게 바라보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몸을 섞든, 구역질나는 남자에게 농락당하든, 참혹하게 능욕당하든 그녀들의 몸과 행위를 묘사한 상스러운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흥분 따위와는 거리가 먼, 애틋해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또는 그녀들의 무력함에 분노가 치밀 뿐입니다. 19금 소설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이 작품에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예상치 못한 감정들이 더 강하게 남게 될 것입니다.

 

저릿할 정도로 섬세한 심리묘사와 찰나의 화려함을 잘 포착한 문장들을 보면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게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절묘한 구성이나 캐릭터를 만들고 포장하는 힘도 매력적입니다. ‘화소도중이 호응을 얻어 미야기 아야코의 다른 작품들도 빠른 시간 안에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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