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매살인
한스 올라브 랄룸 지음, 손화수 옮김 / 책에이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파리인간’, ‘위성인간에 이은 크리스티안-파트리시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각각 작중 배경이 1968, 1969, 1970년으로 설정돼있는데

정치와 역사를 전공한 작가의 방대한 지적 자산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무대입니다.

특히 촉매살인에는 나치주의의 잔재,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

국가정보원의 비밀 스파이 등 굵직굵직한 정치적 서사들과 함께

시기와 질투로 일그러진 사랑, 비극적인 가족사 등 다양한 코드들이 복잡하게 버무려져 있어

앞선 두 작품보다 훨씬 더 볼륨감이 두터워진 느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 ● ●

 

197085, 젊은 공산주의자 마리에가 전철역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합니다.

그녀의 연인이자 그룹의 리더 팔코가 행방불명된 지 꼭 2년째 되는 날에 벌어진 일입니다.

마리에와 팔코 사건을 동시에 수사하기로 한 크리스티안 경감은

두 연인이 속해있던 공산주의 그룹의 멤버들에 대한 탐문은 물론

실종되기 전 팔코가 쓴 논문에서 거론된 나치주의 네트워크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하지만

두 사람의 피살-실종이 단순한 치정극인지, 정치적 갈등의 산물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크리스티안의 비공식 파트너인 천재 장애 소녀 파트리시아는

마리에의 죽음이 또 다른 사건을 야기할 촉매살인이 될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그녀의 예상대로 살인사건이 잇따르지만 마리에의 죽음과의 접점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크리스티안은 사건해결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 ● ●

 

2차 대전 종전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노르웨이의 정국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나치주의자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유지한 채 반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고,

소비에트와 중국을 장악한 공산주의는 유럽의 젊은이들을 들끓게 하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은 찬반으로 갈려 끝없는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가는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을 무대로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구성했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위해 상대의 피와 항복을 요구하는 냉혹한 대결,

가족, 연인, 친구 사이마저 갈라놓은 역사의 상흔과 이념의 차이,

사상적 동지지만 엇나간 사랑으로 인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청춘들...

 

꽤나 묵직한 서사를 바탕으로 작가는 촉매살인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선보입니다.

, 하나의 사건이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또 다른 사건들을 촉발한다는 것인데,

이 작품에선 마리에의 죽음이 선행하는 촉매살인이고,

뒤이어 벌어지는 복수의 죽음들이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들로 설정돼있습니다.

또한 2년 앞서 벌어진 팔코의 실종은 촉매살인을 잉태시킨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엔딩까지 모두 읽은 뒤 이 씨앗으로 인해 양산된 수많은 비극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운명의 아이러니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불가능하고 허망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안-파트리시아 콤비의 수사가 여느 때보다 고전을 거듭한 가장 큰 이유는

사건의 형태가 남녀 간의 단순 치정극처럼 보이기도,

, 정치적 음모에 의한 계획된 사건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사상적 동지를 자처했던 이들이지만 경찰의 탐문 앞에서는 상대의 허물을 기꺼이 폭로합니다.

특히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관한 한 지저분해 보일 정도로 얽히고설킨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런 치정의 관계는 말초적인 재미에 그치지 않고 보다 큰 그림의 일부로 작동하면서

마지막까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꾸준히 자극합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설정들 때문에 촉매살인은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후반부의 반전이나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정서적 충돌을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속도감만큼이나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고,

전작에 비해 재미라는 부분에 작가가 꽤 신경 썼다는 점도 확연히 눈에 보이는데

그런 점들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호평을 남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몇몇 지점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이 작품의 제목이자 이 작품만의 독특함을 상징하는 촉매살인이라는 설정이

개연성이라든가 선명함에 있어 많이 부족했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엔딩에 가서 마리에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촉매 역할을 했는지,

, 그녀의 죽음이 촉발시킨 살인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정체 등이 설명되긴 하지만

어딘가 개연성도 부족하고 인과관계는 작위적으로 끼워 맞춰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파리인간이나 위성인간에서도 지적했던 부분이지만

크리스티안이 파트리시아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그 존재감이 미약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촉매인간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파트리시아에게 기댈 생각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주인공으로서의 미덕이나 매력이 많이 훼손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스 올라브 랄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에게도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다룬 굵직한 미스터리 서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그런 작품들이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너무나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소재라서인지

어딘가 정곡을 피해가는, 순문학적인 정서만 강조된 느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통해서도

불행하지만 기억해야만 할 현대사를 조망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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