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 블랙 로맨스 클럽
제인 니커선 지음, 이윤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동화 푸른 수염은 웬만한 연쇄살인극에 못잖은 잔혹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지녔습니다.

이 동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꽤 많다고 들었는데,

제인 니커선의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역시

모티브가 된 동화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는 스토리로 짜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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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활달하고 그 또래에 어울리는 호기심과 욕망을 지닌 17살 소녀 소피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부이자 후견인인 드 크레삭의 초청으로 그의 저택을 방문합니다.

아직 노예제도가 남아있던 1855년의 미국 남부 미시시피에서

드 크레삭은 외부와 고립된 채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영국의 수도원을 통째로 옮겨 와 저택으로 삼을 만큼 엄청난 거부입니다.

소피아는 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드 크레삭의 매력과 그가 제공한 부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그에게 네 명의 부인들이 있었고,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소피아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종잡을 수 없는 감정기복, 독재자 같은 절대 권력의 남발,

교회나 이웃 등 그 누구와도 접촉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무리한 요구 등

드 크레삭은 날이 갈수록 소피아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숲에서 만난 목사에게 특별한 감정까지 갖게 된 소피아는

자신에게 청혼한 드 크레삭에게 거부 의사를 밝히며 저택을 떠날 것을 선언하지만,

협박이나 다름없는 엄포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오히려 불안한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드 크레삭에게 벗어나기 위해 네 명의 전 부인들의 비밀을 캐기로 마음먹은 소피아는

절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폐허가 된 예배당을 찾으면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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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모, 집착, 열애 등 다양한 형태의 로맨스가 등장하는데다

비명에 간 네 명의 전 부인의 비밀을 파헤치는 후반부의 설정들 덕분에

로맨스 소설 또는 로맨틱 스릴러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잔혹동화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호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힌 10대지만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착한 막내딸이기도 한 소피아,

한때 수도원이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악마의 기운을 발산하는 듯한 엄청난 저택,

저택의 주인이자 외부와 고립된 채 자신의 영역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드 크레삭,

그리고 다국적 식구들 - 영국인 가정부, 중국인 집사, 인도인 수발하인, 프랑스인 요리사 등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동화적 설정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원전인 동화 때문에 드 크레삭의 네 명의 전 부인들의 비밀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녀들의 캐릭터는 제각각이어서 순종적인 여자도, 반항적인 여자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붉은 빛을 띠는 머리카락의 소유자들이었고

자살, 병사, 실종 등 어딘가 미스터리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들은 소피아에게 처음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점차 자매들이라 여기고 싶을 만큼 공통분모를 가진 비극적인 동지애를 불러일으킵니다.

소피아는 저택에 남아있던 그녀들의 머리카락으로 팔찌를 만들고 벽걸이 융단을 수놓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드 크레삭의 다중인격적이고 소시오패스적인 기질로부터 도망침과 동시에

소극적이지만 그녀 나름의 저항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매력과 카리스마를 내뿜던 저택의 주인이자 거부인 드 크레삭이

광기 어린 소시오패스라는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은 아주 천천히, 잔혹하게 묘사됩니다.

감정의 극심한 기복을 보이면서도 그는 소피아를 조근조근 짓밟기 시작합니다.

폭언을 퍼부었다가도 능숙하게 위로하는가 하면,

색욕을 드러냈다가도 어느 새 젠틀한 신사로 돌아옵니다.

옥탑에 갇힌 공주처럼 소피아를 외부와 철저히 단절시켜놓았다가도

곧 방문할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특별 외출을 허락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소피아는 드 크레삭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혐오하다가도 동정하게 되고, 도망치고 싶다가도 보살펴주고 싶어지고...

그리고 그러는 사이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남아있던, 그것도 미시시피라는 미국 남부를 무대로 한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기분 나쁘고 잔혹하고 폭력적인 느낌을 주곤 합니다.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는 그런 느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풍광이나 인물에 대한 작가의 디테일한 묘사들 덕분에 그런 느낌들이 더욱 고조되는데,

이 점은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 가운데 디테일한 묘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데다

소피아의 공포, 드 크레삭의 만행 등 비슷한 에피소드가 반복되다 보니

어지간한 독자들이라면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구조의 이야기입니다.

번역자 역시 좀 힘들더라도 1/3까지만 참으면 그 뒤론 진가를 맛볼 수 있다.”라는 내용의

번역 후기를 남겼을 정도입니다.

독자에 따라선 참아야 하는 지점이 1/3이 될 수도 있고, 2/3가 될 수도 있는데

어쨌든 심하게 디테일한 묘사는 이 작가만의 고유한 개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법 호불호가 갈린 책이긴 한데, 낯선 시대를 무대로 한 잔혹동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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