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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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경제의 상징인 초고층 맨션에서 두 여자가 참혹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검찰은 어설픈 수사와 막무가내식 추정으로 용의자를 체포하고 재판에 넘기지만,

예비 르포작가 나라모토 노에는 진실은 따로 있다고 확신하고 월간지에 기고를 시작합니다.

노에는 살해된 두 여자의 주변을 집요할 정도로 탐문하던 중

명백한 살해동기를 지닌 한 사람에 주목하곤 그 내용을 기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사태는 급변하고, 노에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합니다.

노에는 취재방향을 바꿔 새로운 탐문을 시작하고 결국 나름의 진상을 발표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던 노에 앞에 충격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 ●

 

큰 선만 놓고 보면 무척 심플한 구도처럼 보입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의심을 품은 의욕적인 예비 르포 작가가

끈질긴 취재를 통해 참혹한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인데,

실은 이 작품에는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로 다양한 코드들이 혼재해있어

한 번의 책읽기만으로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저 역시 마지막 반전까지 갔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와 두 번째 책읽기를 마친 뒤에야

흐릿하나마 이야기의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목대로 이 작품에는 꽤 많은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예비 르포작가 노에, 피살된 두 여자 마키코와 요코, 사건을 담당한 검사 다마키 외에도,

노련하고 현실적인 편집장 무라오카, 피살된 두 여자와 인연이 있던 맨션거주자 및 동창생,

그리고 노에가 취재를 위해 만난 대다수의 인물들이 여자들로 구성돼있습니다.

그 가운데 친구라는 애증의 관계로 묶인 특별한 몇 명이 이야기의 중심부에 놓여있습니다.

 

작가는 여자들의 눈과 입을 통해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로 다양한 코드들을 서술합니다.

절친이라 떠벌리고 항상 꼭 붙어 다니면서도 돌아서선 혐오를 느끼는 여자들의 우정의 민낯,

남편의 월급, 고급스런 맨션, 명품 향수와 가방 등 남들이 가진 것에 대한 가공할 질투 등

여자들의 미묘한 심리에 대해 꽤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부터

무계획적인 도시 개발과 집값 폭락, 가정주부의 사회 활동에 대한 제도적 제약,

연예인을 추종하는 팬덤 문화, 여성들의 성 상품화, 밀수입 약을 사용한 불법 낙태,

그리고 부실 수사를 자초한 검찰의 특임검사제, 폭로에 목숨을 건 와이드쇼와 잡지의 행태 등

다분히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다룰 법한 현실비판적인 코드까지 총동원됩니다.

 

그래서인지 초반부터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살해된 그녀들의 과거와 현재 엿보기

책 안에서는 모든 매스컴의, 책 밖에서는 독자의 관심과 시선을 잡아끌고 있습니다.

특히 자궁이 도려내진 채 시체로 발견된 마키코의 경우

커리어우먼이면서 동시에 인터넷에서 성을 팔았던 이력 때문에 더욱 이목을 끄는데

와이드쇼와 잡지들은 그녀의 가족, 친구, 지인들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면서

그녀의 삶을 한오라기도 남김없이 모두 발가벗기려 노력합니다.

 

사건을 추적하는 노에의 경우 검찰의 수사를 비난하며 제대로 된 진실을 찾겠다고 나서지만,

르포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일념 때문에 그녀 역시 넘어선 안 될 선을 쉽사리 넘곤 합니다.

피해자의 이메일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특정한 용의자에게 대놓고 조소를 날리는가 하면,

공개적으로 다음 호에서 범인을 밝히겠다.”는 미끼성 글까지 기고하기도 합니다.

 

이런 구성 덕분에 가독성은 뛰어나고 페이지는 순식간에 넘어가지만,

문제는 마지막에 이르러 뭔가 복잡하게 얽힌 느낌만 들 뿐 이야기의 본질은 생각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내가 뭘 읽었나?”라는 모호한 독후감만 남게 됩니다.

누가 누구를 미워했고, 질투했고, 그래서 살의를 느꼈고... 등의 선정적인 관계만 생각날 뿐,

정작 중요한 범행 동기와 반전의 의미는 깔끔하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비판적으로 거론된 사회적 이슈는 포장지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반전은 작위적인 느낌을 넘어, 없어도 무방했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국 결론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첫 페이지로 돌아갔고,

그렇게 읽은 두 번째 책읽기를 통해 그나마 조금은 선명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이었겠지만,

단순한 사건과 길지 않은 분량 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했던 작가의 의도도

의욕 과잉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꽤 인상적인 문장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인간을 분발하게 만드는 건 부정적인 감정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네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들의 언행을 설명하는 가장 인상적인 문장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물론 주변의 모든 여자들까지 어쩌면 시기, 질투, 증오, 욕망 등

다양한 부정적 감정들에 의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역시 두 번의 책읽기는 필수입니다.

물론 한 번의 책읽기로 그 의미를 이해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혹시라도 실망감이 앞선 독자라면 시간을 내서 재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먼저 출간된 살인귀 후지코의 충동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소문대로라면 실망만 하고 돌아설 작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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