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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작년 초부터 ‘문제 작가(?) 한강의 작품 출간순서대로 읽기’를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당초 의욕만큼 성과를 못 내고 있던 중 갑자기 최신간인 ‘소년이 온다’를 먼저 읽게 됐습니다.
간혹 들러 책에 관한 정보와 서평을 얻곤 했던 파워블로거 정군 님의 포스트
‘분명 당신을 울게 만들 9권의 소설’(blog.naver.com/jmh5000/220476274242) 덕분인데,
제가 베스트로 꼽는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와 함께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문제의 9권 목록에 포함돼있었습니다.
솔직히 ‘소년이 온다’가 어떤 소재를 다룬 작품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강의 소설이 날 분명 울게 만든다고?”라는 반항기 섞인 의문과 호기심 때문에
애초 출간 순서대로 그녀의 작품을 읽겠다는 계획을 무시하고 ‘소년이 온다’를 펼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작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울먹함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신,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분노의 형태와 냄새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 30년도 훌쩍 넘은 오늘날, 그저 불순하고 추악한 자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상업적인 냄새까지 풍기는 듯한 그해 5월의 의미를 새삼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에필로그까지 7개의 챕터로 나뉜 이야기가 여러 화자에 의해 전개됩니다.
그 중심에는 당시 중학교 3학년생으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했던 동호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동호와 함께 시민군으로 나섰던 대학생, 미싱사, 여고생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간적 배경 역시 그해 5월, 5년 후,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등 다양하게 설정됐는데
그 덕분에 ‘그해 5월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광포한 계엄군이 저지른 그해 5월의 살육의 낮과 밤,
살아남은 자들이 겪은, 또 아직도 겪고 있는 슬픔과 치욕,
결코 지워지지 않을 화인(火印)과도 같은 분노와 자책이 아플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세상의 행과 불행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중학교 3학년생 동호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도청에 남아 형들과 누나들과 함께 계엄군을 마주한 것은
그가 대단한 사상가라서도 아니고, 소위 학습된 전사여서도 아니고,
주적의 지령을 받은 조직화된 세력의 행동대원이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부당한 것에 대한, 옳지 못한 것에 대한 순수한 저항이 전부였을 뿐입니다.
미처 동호를 지켜주지 못한 채 저주받은 숙명처럼 광란의 거리에서 살아남은 형들과 누나들은
절대 벗어나지 못할 굴레와 짐짝을 떠안은 채 그날의 악몽 속에서 허우적댈 뿐입니다.
누군가는 뇌리에 남은 피투성이 시신들의 기억 때문에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은 물론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순간조차 견뎌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허기를 느끼고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자신을 무한히 혐오합니다.
누군가는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결국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무너뜨려 다시 혼자가 되는 경로’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끔찍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치유 불가능한 정신병자가 되어 사람을 죽일 뻔한 사람도 있고,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하고, 술과 수면제로 범벅이 돼야 불면에서 벗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에게 의지하기도 했지만, 실상은 서로를 지우고 밀어내고 싶었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 그날의 기억들이, 그날 죽어간 자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 속출했고,
그들 주변의 ‘여전히 살아남은 자들’은 또다시 분노하고, 절망하고, 자책합니다.
그렇게 30년이 넘게 흘렀지만, 치매에 걸린 노모조차 아들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그해 5월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몇 년 전인가,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본 청소년들이 극장을 나서며,
“정말 저런 일이 있었다고? 설마...”라고 말하더라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저 ‘불온한 책과 불온한 선배’들을 통해 그해 5월을 겪은 게 전부지만,
그 청소년들의 반응은 한편으론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해 5월을 알게 해준 ‘불온한 책’ 가운데 황석영 선생이 집필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기록집이 있습니다.
그해 5월의 상세한 상황은 물론 사망자, 실종자 명단까지 수록된 방대한 저작입니다.
90년대에 들어 다섯 권으로 된 임철우의 대작 ‘봄날’이 출간됐고,
2000년대에는 ‘화려한 휴가’를 비롯해 그해 5월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텍스트들에 비해 ‘소년이 온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 그날과 지금의 이야기를 함께 서술함으로써
그날의 싸움도, 그날의 상처도 여전히 진행 중임을 일깨운 점 때문입니다.
2014년에 한강이 새삼 중3 시민군 동호의 이야기를 쓴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소년이 온다’는 독자마다 다양한 느낌을 얻게 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돌아온 기억에 괴로워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 땅에서 벌어진 기막힌 살육에 놀라거나 의문을 표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새롭게 분노할 것이고, 누군가는 과거의 분노가 다시 치미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 어떤 ‘누군가’가 되더라도, ‘소년이 온다’가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해 5월은 잊혀서도, 퇴색돼서도 안 될 시간이며 공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