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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 1 - 경시청 특수범수사계(SIT)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약간의 스포일러 성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1~3부를 합쳐 1,0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 안에 방대한 서사가 펼쳐진 경찰소설입니다.
크게 보면 ‘경찰 대 범인’이라는 장르물의 전형적인 서사가 한 축이고,
‘경찰 대 경찰’이라는, 내밀하지만 폭발력 강한 갈등이 또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년소녀의 목숨을 담보로 한 연이은 유괴사건과 그에 이은 유혈총격전,
집단 인질극 현장에서 벌어진 폭발로 인해 특수부대가 몰살당하는 사건,
도심을 봉쇄한 채 무차별 살육을 벌이며 치외법권을 주장하는 희대의 테러(?) 집단 등
경찰이 상대해야 하는 사건들은 규모나 잔혹성에 있어 전대미문의 것들입니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 자리한 소위 ‘신세계 질서’라는 집단은
기존의 가치와 법, 제도 등을 깡그리 무시한 채
살인, 폭력, 마약 등 사회적 합의에 의해 금지된 모든 것을 해방시키려 합니다.
그 정점에는 유년시절부터 살인, 난교, 마약에 둘러싸여 성장한 미야지가 있고,
그 중심에는 가공할 전투력과 신비한 캐릭터로 무장한 금발의 미소년 지우가 있습니다.
한편, 대립과 갈등, 경쟁과 비방이 공존하는 경찰 내부의 양상은
고위급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묘사됩니다.
두 주인공 가도쿠라 미사키와 이자키 모토코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인격을 지닌 여경입니다.
가도쿠라가 설득과 대화로 피의자 스스로 무기를 버리게 만드는 경찰이라면,
이자키는 위험한 상황을 즐기며 가차 없는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경찰입니다.
가도쿠라는 한때 동료였던 이자키에게 다가가고자 나름 친밀함을 표현해보지만,
이자키는 가도쿠라가 발산하는 여성미나 친절함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두 사람은 미야지와 지우가 일으킨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결국 적으로 만나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고 맙니다.
‘지우’에서 묘사된 경찰 내부의 갈등의 큰 축은 세 부서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수사와 탐문으로 실적을 내야 하는 형사부, 무력진압으로 공을 세우려는 경비부,
은밀한 정보전을 통해 우위를 점하려는 공안부 등이 그들인데,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은 물론 서로를 비방하거나 음해하기도 하면서
수사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노골적이고도 아슬아슬한 대립이 사실감 있게 그려집니다.
동시에, 일단 흥분부터 하고 보는 다혈질 부장, 얼음처럼 차갑고 냉철한 중간 간부,
인간미와 능력을 겸비한 이상적인 현장 수사관 등 다양한 인물들이 적절히 포진돼있어
경찰 조직의 단면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경찰 대 범인’ 구도만큼이나 독자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이미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를 통해 혼다 테쓰야의 팬이 된 터라
‘지우’ 역시 큰 기대감을 갖고 있었고, 기대한 만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두세 가지 점에서 큰 아쉬움을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미야지가 이끌고 지우가 중심에 서있던 ‘신세계 질서’라는 그룹의 정체성인데,
여러 인물을 통해 그룹이 지향하는 바가 설명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해설에서 지적한대로) 약간은 황당무계하게 느껴진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아나키스트, 즉 사상적으로 제대로 무장된 무정부주의 단체도 아니고,
미래나 지속성을 염두에 둔 치밀하고 계획적인 혁명도 아니며,
고작 3일 천하도 보장할 수 없는, 다분히 무모하고도 충동적으로 보이는 ‘거사’는
그들의 정체성과 지향점에 공감하기 힘들게 한 것은 물론,
이야기 전체의 사실감도 현저히 떨어뜨린 대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세컨드 주인공인 이자키 모토코의 행적에 관한 것인데,
중요한 지점마다 그녀가 내린 선택들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애초 도덕적 동기와는 무관하게 경찰이 된 그녀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가 ‘신세계 질서’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나
도심 봉쇄 후 무차별 살상에 가담하는 정황, 또 ‘신세계 질서’와의 절연을 결심하는 계기는
조금은 뜬금없어 보일 정도로 갑작스럽고 개연성 없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인 지우의 캐릭터에 관한 것인데,
사실 판타지라 해도 좋을 만큼 ‘신비함’을 앞세워 그려진 인물이다 보니
모호하거나 과장된 부분이 있더라도 큰 거부감 없이 읽힌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신세계 질서’를 배신하는 장면이나
그가 저지른 모든 행동의 근원을 설명한 엔딩의 몇 페이지에서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넌센스에 가까운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또 그를 동정하는 듯한 에필로그 역시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1~3부까지의 서평을 한꺼번에 쓰다 보니 아무래도 매크로한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는데
디테일을 이야기하자면 세 편의 작품마다 각각의 장편의 서평이 필요할 것입니다.
혼다 테쓰야의 팬이라 약간의 아쉬움이 있더라도 대체로 좋은 쪽으로 평가하긴 했지만,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워낙 방대한 작품이라 시작하기가 쉽진 않겠지만,
일단 시작하면 호불호에 관계없이 순식간에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혹시 ‘지우’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독자라도
혼다 테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는 한번쯤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