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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해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7월
평점 :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을 편집한 줄거리입니다.)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4년, 포경선 유키마루가 해군 식량 조달을 목적으로 출항한다.
배에는 일본인 선원뿐 아니라, 자원하거나 차출되어 끌려온 조선인, 대만인들이 승선한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할당된 어획량을 채우기 위해 조업을 하는 동안
유키마루의 선원들은 기본적인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환경에서 허기와 갈망에 시달린다.
미군의 폭격으로 엔진이 고장 난 유키마루는 논란 끝에 엔진을 교체하기 위해
똑같은 모델의 배가 버려져 있는 남극으로 타륜을 돌린다.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버티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추악한 감정들이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결국 사투 끝에 도착한 남극해에서 모든 선원에게 치명적인 사건이 발발한다.
증오와 욕망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 유키마루에서 결국 살아남는 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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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은 위험해’라는 눈에 띄는 제목만 기억할 뿐 임성순 작가와는 처음 만나는 작품입니다.
‘극해’의 서평을 찾아보니 2010년 세계문학상 수상 후 많은 독자에게 주목받던 작가였습니다.
새삼 외국의 장르물에만 몰두하던 책읽기 습관이 부끄럽더군요.
‘극해’ 역시 제목에 꽂혀 작년부터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작품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욕망과 본능의 충돌을 다루고 있었는데,
시대 배경이 1944년이라는 설정은 의외였습니다.
광란의 바다를 떠다니는 포경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묵인된 폭력과 착취,
죽음마저 쉽게 감춰지는 공간이라는 설정만으로도 긴장감을 충만시키기에 충분할 텐데,
거기에 식민지 시대의 착취와 피착취의 대립 구도까지 갖춰진 덕분에
이야기는 첫 출발부터 독자에게 평범하지 않은 무게감을 던져줍니다.
‘극해’는 오감 가운데 특히 후각을 많이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남자들의 땀 냄새, 포경선을 뒤덮은 비린내, 폭력의 부산물인 피와 고름의 냄새 등...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바다 위의 유키마루는 열린 밀실 그 자체입니다.
그 밀실을 부유하는 갖가지 불쾌한 냄새들은 억압되고 짓눌린 자들의 분노를 고양시킵니다.
그것은 포경선의 지배자가 일본인이고, 고통스러운 노동의 주역이 조선인이라서가 아닙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는 일종의 도화선 역할을 할 뿐, 핵심은 인간의 욕망과 본능입니다.
그래서, 증오와 갈등은 일본인 사이에서도, 조선인 사이에서도 똑같은 힘으로 증식해갑니다.
하늘에서는 미군의 폭격기가, 바다 밑에서는 연합군의 잠수함이 유키마루를 위협하는 가운데
선상에서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갈등이 한없이 격화됩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겠다는 본능은 자연히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욕망을 낳기 마련입니다.
포경선 유키마루는 이런 비인간적인, 또는 거꾸로 너무나 인간적인 기운이 날뛰는 곳입니다.
누군가는 이미 폭력의 화신으로 완성된 인격체였고,
누군가는 자신의 고운 천성을 잃어버린 채 끔찍한 도살자로 변신합니다.
“사람을 전율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말이죠. 힘이죠.
손안에 상대방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그건 거의 사정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죄가 아니잖아요.”
설득과 대화는 사라지고 선한 의지와 공동체적 협력은 아무 쓸모도 없는 허상일 뿐입니다.
위태로운 균형은 결국 파괴되고, 유키마루에서는 살육의 파티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선징악도 아니고 이야기의 행복한 종결도 아닙니다.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고, 피해자는 가해자로 변신하며, 폭력은 더욱 강화되어
유키마루를 휩쓰는 역한 냄새를 더욱 고약하게 만들 따름입니다.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 저지르는 죄악,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던 자의 광기,
시대와 전쟁이 불러일으키는 생에 대한 환멸은 ‘인간’이라는 참담한 심연을 더욱 들끓게 한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들여다본다.“라는 소개글은 ‘극해’의 미덕을 단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재미있지만 불편한 책읽기를 감수해야 하고, 이야기가 끝이 나도 결코 개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연을 들여다본 후의 후회와 먹먹하기만 한 여운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캐릭터라든가 미스터리가 풀리는 지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이지만,
크고 굵직한 서사를 대중적인 재미와 함께 잘 녹여낸 필력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 재기발랄함, 그리고 부조리함을 직시하는 시선을 갖췄다는 평가 때문에라도
‘극해’를 통해 처음 만난 임성순 작가의 전작들을 꼭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