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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팽창 ㅣ 스토리 살롱 Story Salon 3
구보 미스미 지음, 권남희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로 처음 만난 구보 미스미의 인상은 정말 강렬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화자를 맡으며 파격적인 성애부터 뭉클한 감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인연과 감정들을 억지스럽지 않게, 120% 공감하게끔 풀어낸 작품으로,
개인적으로 전 장르를 통틀어 베스트 중 하나로 꼽는 작품입니다.
그녀의 신작 ‘밤의 팽창’은 ‘한심한~’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형제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게이스케와 유타,
그리고 두 형제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미히로 등 세 명의 주인공이 번갈아 화자를 맡아
코흘리개 시절부터 30대를 앞둔 지금까지의 10여 년간 서로가 주고받은 애증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삶은 ‘사랑과 전쟁’ 그 자체입니다.
게이스케와 유타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다가 폐암으로 쓸쓸히 죽어갔고,
미히로의 어머니는 12살 연하의 남자와 눈이 맞아 3년간 집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고교 시절, 동생 유타가 미히로를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먼저 고백을 한 게이스케는
결국 미히로와 결혼을 약속하고 동거에 들어가지만 현재는 섹스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배란기가 올 때마다 ‘발정하는 기계’처럼 몸이 달아오르는 미히로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어머니의 더러운 피를 저주하면서도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탐하지 않는 게이스케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형과 결혼할 미히로를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는 유타는
어느 날 자기 앞에 나타난 돌싱녀와 사랑을 나누지만 마음까지 주진 못합니다.
세 남녀 사이의 애증을 가로지르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섹스입니다.
게이스케는 아이가 태어나 가족이 완성된다면 섹스란 없어도 무방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여자가 성욕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반대로 미히로는 섹스 없는 결혼이란 불가능하다고, 인공적인 임신은 무의미할 뿐이라고,
그렇게 이룬 가족이란 것은 모래위에 지은 성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발적으로 딱 한번 미히로와 섹스를 한 유타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때 미히로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세 사람의 이런 차이는 실은 좀더 근원적인 곳에서 발생한 것들입니다.
미히로가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그래서 더 기복이 큰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라면,
게이스케는 ‘계획과 관리’에 의한 어긋나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캐릭터입니다.
유타는 두 사람의 중간쯤에 위치했다고 할까요?
구보 미스미는 주어진 삶에 대처하는 세 사람의 차이를 유년기부터 꼼꼼하게 설계했고,
그 설계도 위에 부모나 친구, 또 다른 연인 등 다양한 조연을 포진시켜
세 사람의 극적인 인생항로를 정교하지만 감성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남녀 간의 애증을 섹스를 매개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면
언뜻 과격하고 다혈질적인 캐릭터, 흥분으로 가득 찬 문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구보 미스미는 ‘한심한~’에서도 그랬듯 ‘직설과 담담함’을 절묘하게 섞은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사실감을 높이는 필력을 선보입니다.
섹스에 관해서는 옆 사람이 책을 들여다볼까 신경 쓰일 정도로 직설적인 묘사를 동원하지만,
가족이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희로애락이나 남녀 간의 애틋한 감정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쿨한 것 이상의 건조함이 느껴질 정도로 담담한 묘사에 집중합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수시로 에쿠니 가오리가 떠올랐는데,
아마 불륜 또는 어긋난 인연을 자주 그린 그녀의 작품 세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가 (상대적으로) 예쁘고 가녀린 문장들로 독자의 감성에 호소했다면,
구보 미스미는 좀더 현실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공감의 폭을 넓힙니다.
다만, 전작인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나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에 비해서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연애소설이라고 단정 짓기엔 나름 다양한 인격과 감정을 폭넓게 표현한 작품이긴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고 아프게’ 만드는 서사의 깊이는 기대에 비해 부족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앞선 두 작품이 짙은 여운, 또는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을 남긴 것에 비해
조금은 가벼워 보이는, 왠지 인공미가 느껴지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점이 아쉬웠습니다.
(고백하자면,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의 서평에서 “다음 작품에서는 가끔씩 웃을 수 있는
이야기와 캐릭터들도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해놓고는 또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번쯤 마음속에 품어봤을 법한, 또는 한번쯤 눈 딱 감고 과감하게 저질렀던,
하지만 상식과 통념, 도덕이라는 굴레 때문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평생의 비밀로 간직했을 날것 같은 감정들이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는 덕분에
‘밤의 팽창’은 구보 미스미의 독특한 매력이 발산된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갓 나온 따끈한 신간을 끝냈지만, 또다시 그녀의 작품을 기다리게 됩니다.
다음엔 또 어떤 파격을 들고 독자를 찾아올지 그저 궁금하고 기대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