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나체들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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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파격적인 설정과 성()에 관한 직설적인 묘사 때문에 19금 판정을 받은 작품이지만

사실 두 남녀의 8개월 동안의 만남과 그것이 파국에 이르는 과정 자체는

새삼 19금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2015년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진부한 스토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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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보다 조금 못 미치는 외모를 지닌 덕분에 연애는 남 얘기처럼 알고 지내던 한 여자가

집단 괴롭힘의 트라우마, 열등감과 증오심으로 가득 찬 한 남자를 인터넷에서 만납니다.

8개월 동안 두 남녀는 파괴적이라 할 만큼 섹스에 집착하게 되고,

남자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두 사람의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한 후 인터넷에 올립니다.

파국을 감지한 여자가 결별을 선언하려던 순간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고

두 남녀의 8개월의 치명적인 관계는 온 세상에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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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나체들은 스토리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지만,

모자이크 된 얼굴, 이름을 대체한 닉네임, 그리고 그를 통해 확보된 인터넷 상의 익명성

현실과 가상공간에서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점에 관해서만큼은

충분히 주목받아 마땅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외모도 성격도 평균을 넘지 못하는 요시다 기미코는

평범한 수준의 연애조차 요원한 일이 돼버리자 미키라는 닉네임 뒤에 숨어 남자를 찾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얼굴은 어떻게 해도 그 근본을 뜯어고칠 수 없는 불행한 유전의 결과였고,

콤플렉스로 커져버린 뒤에는 그녀 자신을 익명성의 세계로 숨게 만든 단초입니다.

그녀는 나중에 남자가 인터넷에 올린 자신의 얼굴 없는 나체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조차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요시다 기미코인지, 미키인지, 어느 쪽이 진정한 자신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집단 괴롭힘의 트라우마와 열등감에 사로잡힌 가타하라 미쓰루는

학교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여자의 얼굴에 투사함으로써 대리만족과 쾌감을 느낍니다.

그는 여자는 남자의 변기라는 여성관을 가졌으며,

옷을 입은평범한 여자와의 사랑이 불가능한 남자입니다.

“(여자는) 사실은 누구나 암캐처럼 탐욕스러운 욕망의 노예이면서, 짐짓 시치미 뗀 얼굴로

그것을 은폐한다. 그런 낯짝이 나를 업신여기고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는 미치라는 닉네임 뒤에 숨어 자신의 성욕을 처리해줄,

마음껏 더럽힘으로써 수치심과 굴욕을 맛보게 해줄 여자의 얼굴을 찾아다닙니다.

 

모자이크와 닉네임 뒤에 숨었던 미키와 미치의 관계는 결국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하지만

세상은 온통 관음증 환자처럼 수면 위에 드러난 그들의 섹스동영상에만 집착합니다.

그들은 미키와 미치가 숨기려고 했던 모자이크 속의 얼굴을 벗겨내고 싶었고,

닉네임이 아닌 그들의 실명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얼굴과 이름을 숨기려는 미키와 미치도 그렇고, 그들의 민낯을 확인하려는 세상도 그렇고,

모두 픽션이 아닌 현실 속에서, 인터넷 속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현상입니다.

 

단지 19금이라는 딱지와 그를 초래한 선정성 때문에 이 작품에 관심을 갖는다면

대략 기대치의 절반 정도는 만족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와 미덕은 성애소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인터뷰는 이 작품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와 의미, 미덕 등을

잘 요약해놓았는데 그것을 인용하는 것으로 서평을 마칠까 합니다.

 

얼굴이란 인간의 동일성을 담보하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얼굴로 어떤 사람인지가 구분되고, 얼굴을 통해 한 인간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그 얼굴을 가릴 수 있기에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게 아닐까...

바로 그것이 제가 이 책에서 쓰고 싶었던 것 중 하나입니다.

(야후 북스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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