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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브리오 기담 ㅣ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평점 :
‘엠브리오 기담’은 오츠이치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괴담 전문지 ‘유’(幽)에 발표했던 단편 9편을 모은 작품집입니다. 이 작품에 부제를 붙인다면 ‘로안과 미미히코의 기이한 여행’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온천이나 식당을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를 집필하는 작가 이즈미 로안과 그의 조수(?)인 미미히코가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나선 길에 겪은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경험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즈미 로안은 직선으로 난 외길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는 타고난 길치로 유명한데, 그를 따라가다 보면 같은 자리에서 며칠이고 계속 맴돌거나 산을 오르다가 바다에 이르는가 하면, 숲을 헤치다가 남의 집 마당에 이르곤 합니다. 로안의 조수인 미미히코는 어딘가 덜 떨어지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데다 조수 일로 번 돈은 전부 노름판에 갖다 바치는 대책 없는 한량입니다. 로안과의 여행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들 때문에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지만 노름빚을 대신 갚아주는 로안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로안의 불치병 같은 길치 증상은 처음 대하는 사람에겐 공포심마저 자아내지만 로안을 잘 아는 미미히코에겐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괴이한 경우는 늘 있는 일이라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라든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런 건 늘 있는 일이다.”는 식으로 웃어넘길 뿐입니다.
물과 기름 같지만 미운 정까지 푹 들어버려 오래된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위험천만한 여행길에 겪은 경험들은 특별하다 못해 기이하고 끔찍합니다. 낙태전문병원에서 내다버린 한 낙태아의 기구한 운명(엠브리오 기담), 영원한 환생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의 파란 돌(라피스 라줄리 환상), 밤마다 죽은 자가 나타나는 온천(수증기 사변), 나무, 생선, 쌀, 벽지 등 모든 것이 사람 얼굴로 보이는 마을(끝맺음), 여행자의 눈에 착시를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40년 전에 무너진 다리(있을 수 없는 다리), 극한의 공포와 인육의 참상이 함께 한 여행담(지옥), 빗과 머리카락에 얽힌 섬뜩한 괴담(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등 결코 현실에서는 마주칠 수 없는 경험들이 담담하지만 그래서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문장들 속에 녹아있습니다.
내용만 요약해놓고 보면 분명 잔인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인데, 읽는 내내 깃든 정서는 정반대로 슬프거나 따뜻한 쪽에 가깝습니다. 물론 오츠이치의 ‘ZOO’, ‘GOTH’, ‘암흑동화’ 등에서도 그런 역설적인 느낌을 받은 적이 있지만, ‘엠브리오 기담’은 한두 작품을 제외하곤 대부분 공포와 애틋함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수록작이자 이즈미 로안의 프리퀄 에피소드인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는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뒤섞인 구성 속에 첫사랑 이야기의 정서까지 녹아있어 괜히 울컥하고 뭉클한 느낌까지 건네줬습니다.
오츠이치의 천재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엠브리오 기담’은 무궁무진한 그의 상상력과 매력적인 필력을 한껏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번역가는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오마주 형식으로 후기를 써봤다.”라고 격찬하면서 특별한 능력자 이즈미 로안과의 재회를 기대한다는 평을 남겼습니다. 저 역시 오츠이치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도 격하게 애정하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야마시로 아사코의 새로운 작품을 꼭 다시 한 번 만날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혹시 오츠이치의 전작들이 불편하게 느껴진 독자라 하더라도 ‘엠브리오 기담’은 오츠이치의 새로운 면모를 만나볼 수 있는 계기가 돼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