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매듭과 십자가에 이은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당초 시리즈 집필 계획이 없던 이언 랜킨은 매듭과 십자가에서

존 리버스의 끔찍한 트라우마를 사건과 직결시킨 탓에

사건 전개보다 그의 과거사나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결과적으로 영국에서 매년 팔리는 범죄소설 중 10퍼센트를 차지하는 엄청난 시리즈

존 리버스 시리즈의 첫 작품은 좀 밋밋한 스릴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숨바꼭질은 존 리버스를 소개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탓인지

좀더 스릴러의 본령에 충실한 미덕들을 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 ● ●

 

폐가로 전락한 주택단지 필뮤어에서 마약중독자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리버스는 새로운 파트너 홈스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단서들은 일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랜덤함 그 자체입니다.

독극물이 든 마약을 투여하고 죽은 시신, 오컬트 의식에 따라 배치된 시신과 소품들,

벽에 그려진 오각별과 그 곁에 붙어있는 에든버러의 풍광을 담은 사진들,

남창이면서 사진작가를 꿈꿨던 희생자의 이력,

그리고 숨어! 그들이 오고 있어! 그들이 날 죽였어!”라는 여친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 등

리버스는 수많은 단서 속에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아득할 따름입니다.

끈질긴 탐문과 거듭되는 현장 방문, 희생자의 흔적에 대한 추적 등을 통해

리버스는 누군가 희생자를 의도적으로 살해한 정황을 찾아냄과 동시에,

때맞춰 날아든 제보를 통해 에든버러를 충격 속으로 몰고 갈 끔찍한 사실을 알아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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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은 자신이 나고 자란 에든버러에 대한 작가의 애정으로 똘똘 뭉친 작품입니다.

첫 장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이언 랜킨은 에든버러를 타락시킨 런던에서 온 외지인들과

그들이 실어 나른 추악한 변화들 가령, 부동산 개발이라든가 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씁쓸함을 표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애정을 넘어 이언 랜킨은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이야기 전반에 투사하고 있습니다.

마약은 어느 새 아름답고 깨끗하던 에든버러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게 됐고,

길거리엔 남창들이 공공연히 호객행위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한때 재개발로 각광받았지만 지금은 폐가가 된 곳입니다.

이런 에든버러의 타락을 배경으로 숨바꼭질은 존 리버스가

한 마약중독자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전형적인 스릴러 공식을 따라 전개됩니다.

 

매듭과 십자가에서 어딘가 해리 보슈나 해리 홀레를 연상시키는

암울하고 회복불능의 상처투성이 캐릭터로 묘사됐던 존 리버스는

숨바꼭질에서는 훨씬 더 유연해졌을 뿐 아니라 조금은 뻔뻔스러운 캐릭터로 진화했습니다.

진급도 했고, 상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를 줄도 알고, 부하를 쥐락펴락 다룰 줄도 압니다.

물론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외톨이 기질까지 버리진 못했지만

어쨌든 전작에 비해 꽤 매력적인 캐릭터로 성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매듭과 십자가에서 느낀 아쉬움들이 어느 정도 해소됐음에도 불구하고,

숨바꼭질은 여전히 엄청난 시리즈의 진면목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마약, 오컬트, 남창, 수상한 경찰 등 일관성 없는 많은 단서들이 존 리버스 앞에 던져지고,

그로 인해 그의 수사는 다방면으로 전개되지만, 찔러본 곳에 비해 결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새 파트너인 브라이언 홈스가 던진 한마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군요.”처럼

사건을 복잡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작가는 무리한(또는 과한) 설정을 펼쳐놓았지만

사실 이 설정들이 적절한 효과나 반전의 기반을 만들어냈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말하자면, 심플한 사건의 구도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재료를 보충했지만

그 재료들 가운데 후반부에 가서 제 역할을 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매듭과 십자가에서도 그랬듯, 수사가 급물살을 타는 계기는

뜻하지 않은 깨달음과 때맞춰 날아드는 외부의 제보였습니다.

작가가 너무 많은 일들을 벌인점은 오히려 납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반면,

깨달음과 제보는 사실 아쉬움을 넘어 실망감을 안겨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아쉬움은 저만의 특별한 느낌일 수도 있고,

엄청난 시리즈의 진면목에 대한 과한 기대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에든버러에 대한 애증, 사회적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재미와 속도감이 붙은 서사 등

숨바꼭질만의 미덕은 두루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어쩌면 올해 안에 볼 수 있다는 세 번째 시리즈 이와 손톱에서는

저의 기대감이 제대로 충족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분의 서평을 보니 이와 손톱에서 이언 랜킨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존 리버스에 관한 충분한 예습까지 마친 이상

엄청난 시리즈의 진면목을 발견할 때까지 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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