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자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최필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노르웨이의 소도시에서 잇달아 괴사건이 벌어집니다.

피범벅이 된 아기가 발견되고,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부고 기사가 나는가 하면,

거짓 사고 전화가 빈발하고, 우리를 벗어난 사냥개가 소년을 습격하기도 합니다.

노형사 세예르는 악의로 가득 찬 일련의 괴사건을 쫓으면서

고요한 숲으로 둘러싸인 소도시가 순식간에 공포로 휩싸이고,

평화롭기만 하던 가족들의 일상이 참혹하게 붕괴되는 참상을 목격합니다.

 

● ● ●

 

원제도 ‘The Caller’이고 번역제목 역시 발신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딱 어울리는 제목은 악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피가 튀는 참혹한 연쇄살인도 없고, 복잡하고 이리저리 꼬인 미스터리도 없는데다

작가는 처음부터 범인과 범행수법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범행수법이란 것도 직접적인 위해와는 거리가 먼 장난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너무나 사실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내가 연쇄살인마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은 로또에 당첨될 가능성보다 낮겠지만,

거짓 전화나 악의 섞인 장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은 그보다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결코 장난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금세 거짓이나 장난으로 판명난다 하더라도

누군가로부터 너의 아이를 유괴했다.”는 협박전화를 받은 일이 있다면,

아이의 부모는 (적어도 한동안은) 아이에 대한 걱정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이런 사태를 몰고 온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다가 기어이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발신자는 이런 악의로 가득 찬 장난이 초래한 수많은 파국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피범벅이 된 아기가 발견된 첫 사건 이후

범인의 장난은 갈수록 사소해지고 유치해지지만 체감 공포는 오히려 높아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하찮은(?) 범인이 자아낸 공포심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범인의 장난에 걸려든 가족들이 충격과 패닉을 거쳐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마치 심리소설의 한 대목처럼 디테일하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 덕분일 것입니다.

번역하신 최필원 님도 후기를 통해 이런 분위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잔잔하고 밋밋한 느낌이지만 그 안에는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강렬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시한폭탄을 품고 독서하는 기분이랄까.

 

작가가 창조한 범인은 소시오패스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살의와 증오의 대상일 뿐인 불행한 가족의 역사,

유년기부터 시작된 또래로부터의 소외와 고립,

오토바이, 애완동물, 병든 할아버지에 대한 비정상적이고 집착에 가까운 애정 등...

희생자를 선택하는 기준 역시 때론 시기와 질투심에 의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무작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제멋대로입니다.

이런 전형적인 특징을 갖춘 소시오패스라면 당연히 피와 살이 튀는 범죄가 연상되지만,

작가는 그에게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난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예전엔 겪어보지 못한 역설적인 공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바글거리는 세상이 좋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새하얀 옷들과 페인트 냄새.

좋은 만큼 다 망쳐놓고 싶었다.

모두가 벼랑 끝에 서있어. 그는 생각했다.

내가 다 떠밀어버릴 거야.

 

카린 포숨과 처음 만났던 야간시력이라는 작품 역시

내게 여자가 있다면..”을 끊임없이 되뇌며 사랑을 갈구하는 특이한 사이코패스 릭토르의

불안정한 심리와 기이한 행동들을 느린 속도로 그려낸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

발신자는 카린 포숨의 대표 캐릭터인 세예르 형사가 등장한다고 해서

스릴러의 성격이 강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에 덧붙여 독특한 심리물의 장점도 잘 살아있어

노르웨이 스릴러의 여왕'이라는 그녀의 명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다만, 정통 스릴러를 원하는 독자에겐 양념이 좀 덜 된 느낌이 들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혹시 야간시력을 조금 어렵게 읽은 독자라도,

그래서 카린 포숨의 명성에 약간이나마 의문을 가졌던 독자라면

발신자를 통해 어느 정도는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