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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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3편의 중편과 1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품집입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독하다. 어쩌면 읽기 힘든 곳이 몇 군데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 속 구절대로 스티븐 킹은 잔혹, 엽기, 공포의 끝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들과 함께 아내를 살해하고 시궁쥐가 득실거리는 낡은 우물 속에 사체를 유기한 남자,

외딴 도로에서 여자들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배수구에 버린 남자,

대출만기는 물론 남자의 성기, 여자의 코, 심지어 생명까지 연장해주는 선한 메피스토텔레스,

그리고 30년이 넘도록 경찰의 눈을 피해 11명의 여자를 강간-살해한 두 얼굴의 악마 등

그야말로 스티븐 킹의 피조물다운 캐릭터로 중무장한 극강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네 가지 이야기를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는 응징 또는 복수입니다.

자신을 망가뜨린 자에게 정공법대로 복수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신이 망가뜨린 자의 유령에게 처절하게 복수당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고백대로 정말 읽기 힘든 곳이 몇 군데(보다 훨씬 많이) 있었지만,

그의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중간에 눈을 떼거나 외면하는 것이 더 힘들었기에

입안 가득한 씁쓸한 느낌에도 한 글자도 허투루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비범한 상황에 놓인 평범한 인물들에게 훨씬 더 흥미를 느낀다.”는 킹의 고백은

참혹하게 죽어간, 또는 오히려 죽지 못해 더 큰 괴로움을 안게 된,

또는 복수하지 않고는 화병 때문에라도 더는 살아갈 수 없거나

실천할 용기도, 자신도 없는 마음 속 복수심에 평생 상처를 안고 산 등장인물들을 감안하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잔혹한 고백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날것처럼 작위적이지 않고,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복수에 관한 킹의 이야기는

어쩌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두고 있는 비밀스런 욕망들을 민낯 그대로 들춰냄으로써

그의 흥미의 목표가 단순히 잔혹과 엽기와 공포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자신의 땅과 권위, 아들 등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무례한 아내를 죽이고 싶은 남자의 욕망은

옆에서 살인을 거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공감할 수 있는 감정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오래된 절친에게 악마의 힘을 빌어

자신의 불행을 전가하려는 한 남자의 소심한 복수심도 응원의 대상입니다.

짐승처럼 자신을 강간하고 배수구에 내다버린 일당을 향한 복수심이나

순박한 가면 속에 연쇄살인마의 얼굴을 감추고 살아온 남자를 향한 용서할 수 없는 분노는

말할 것도 없이 누구나 공감하고 응원해주고 싶은 감정들입니다.

킹은 작품의 외피를 잔혹, 엽기, 공포로 꾸몄지만,

정작 그가 버무려넣은 속살은 다양한 욕망과 감정의 민낯들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작품마다 비범한 상황에 놓인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사건도, 감정도 무리하게 과장되거나 작위적으로 설정되지 않습니다.

불편하거나, 무섭거나, 힘든 책읽기 속에서도

나라도 저랬을 거야.”, “나도 그러고 싶었을 걸.”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던 것은

독자들의 비밀스런 욕망을 꿰뚫어 본 킹의 필력이 빛을 발한 덕분일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킹의 고백을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이 할 리가 없는 행동을 글로 쓰는 작가들한테는 비웃음밖에 줄 것이 없다.

형편없는 글은 사람들의 실제 행동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살인자들도 때로는 할머니가 길을 건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처럼 자유자재로 문장과 단어를 구사하며

공포로 가득 찬 장면에서도 웃음을 이끌어내는 킹의 필력은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할머니를 도와주는 살인자라는 이 함축된 구절 하나만으로도

이야기를 구상하고, 설계하고, 지면에 완성해가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태도가

(그의 표현대로) ‘형편없는 글을 쓰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비교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할머니를 도와주는 살인자이거나 살인자에게 도움을 받은 할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외성도 크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감 있는 인물들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이 킹의 유려한 문장들 속에서 사건을 만들고, 복수를 감행하면서

더없이 무서운, 하지만 더없이 생생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툰 작가를 만났다면 뻔한 복수담으로 전락했을 소재들이

스티븐 킹의 손에서 공감과 성찰을 담은 이야기로 거듭났다.”워싱턴 포스트의 평은

이 작품의 미덕을 제대로 포착해낸 명문이라는 생각입니다.

 

킹의 마니아들에 비하면 아직 초보에 불과한 팬 수준이지만,

별도 없는 한밤에는 지금까지 읽은 킹의 작품 중 상위에 올려놓고 싶을 만큼

재미나 완성도 면에서 수작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그동안은 킹의 장편 위주로만 작품을 골라왔는데, 새삼 중단편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이 작품집을 킹의 마지막 중편집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 닐 게이먼의 말만큼은

그저 막연한 추측이거나 마케팅을 위한 낚시성 멘트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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