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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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카일러 굿윌과 머시 스톤 사이에서 태어나

80여 년의 삶을 살다 간 데이지 굿윌 플렛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다이어리라는 제목을 갖고 있지만, 일기, 편지, 독백, 3인칭 서술 등

각 챕터마다 내용에 어울리는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산업과 과학, 사회와 문화 등 전 분야에서 격변을 겪던 20세기의 시작 무렵에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인생을 출발한 한 여자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어쩐지 지금의 시대를 사는 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에피소드들 부부, 가족, 친구, 사랑, 애증 등 이 등장합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보이는 엄청난 가계도(家系圖)가 암시하듯

이야기는 데이지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평범한 채석꾼에서 최고의 석공 자리에 올랐지만 딸에게는 가깝고도 먼 존재였던 아버지,

데이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줬지만 정작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고 숨을 거둔 어머니,

오갈 데 없던 데이지를 보살피며 키워준 양어머니,

20년 이상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데이지의 인연이 된 남편,

그리고 늦은 나이에 얻은 좌충우돌 세 자녀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고,

동시에 데이지의 평생의 절친들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맛깔난 조연 역할을 해줍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거나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린 사람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여자의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서 더 공감과 이입의 폭이 넓었던 것 같습니다.

, 나도 이렇게 나이를 먹고, 이렇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맞이하겠구나, 라는 공감,

, 딱히 본받거나 존경할만한 미덕은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내 어머니, 아내, 딸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이입이

잔잔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꾸준히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데이지와 그녀의 남편 바커 플렛이 식물과 정원을 사랑했던 사람이라 당연한 결과겠지만

자연과 식물에 관한 상세하고 꼼꼼한 문장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녀가 태어난 캐나다 작은 마을이나 삶의 터전을 잡은 여러 곳의 자연 풍광,

또 남편을 잃은 뒤 그녀의 삶을 빛나게 해줬던 꽃과 식물에 대한 애정은 특히나 각별한데

그것들은 단지 소품이 아니라 데이지의 삶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들이 돼줍니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성실한 자료조사의 결과라고만 볼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작가의 애정 어린 묘사들이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아주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를 깊게 음미하며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르물의 빠른 책읽기에 익숙해져서 처음엔 좀 곤혹스러웠지만,

일부러 읽는 속도를 줄이자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느린 책읽기가 어려운 독자들에겐 쉽지 않은 도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롤러코스터 같은 진폭이나 극적인 갈등보다는 제목처럼 다이어리에 충실한 내용인데다,

20세기 초반의 올드함 또는 고전미를 연상시키는 아날로그 식 문장들로 쓰인 탓에

폭풍 같은 서사와 어느 정도 막장스러운 가족사를 기대한 독자들이나

쉽고 간결한 현대의 문장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겐 자칫 지루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잔잔한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듯 차분하게 데이지의 삶을 지켜볼 준비가 돼있다면,

또 작심하고 안전속도이하로 읽어갈 수만 있다면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평 가운데 삶에 대한 긍정과 찬미라는 찬사가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평이라는 생각입니다.

데이지는 아주 찰나의 몇몇 순간을 제외하곤 결코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삶에 대해 긍정하거나 찬미하기 보다는

그때그때 자신 앞에 주어진 고난과 고비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며

그 결과에 대해 때론 웃기도, 때론 눈물짓기도 하면서 8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녀는 낙관주의자도, 희망론자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삶을 전반적으로 지배한 것은 작가의 말처럼 슬픔의 정서였고,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삶과 아주 많이 닮아있습니다.

만약 데이지가 고난 속에서도 삶을 예찬하는 인간극장의 주인공으로 미화됐더라면

아마 이 작품의 미덕은 상당 부분 훼손됐을 것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언젠가는 이만한 깊이와 굴곡까지 지니진 못하더라도

내 곁을 지나친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다이어리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끊임없이 기억을 파내려가다 보면 스스로도 깜짝 놀랄 별의별 해프닝들이 많이 떠오를 것이고

거기에 연관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들과 나눴던 희로애락을 평범한 문장으로라도 엮어놓고 두고두고 읽어볼 수만 있다면

그저 미미한 삶일지라도 나름의 의미를 찾고 잠시나마 빙긋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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