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부부를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이 잠적합니다. 그의 이름과 사진이 언론과 인터넷에 공개되고

전방위적인 수사가 진행되지만 범인은 성형수술까지 받으며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갑니다.

그리고 세 남자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어촌 마을에 흘러들어와 불우한 이력을 지닌 소녀 아이코와 인연을 맺는 청년 다시로,

게이들이 모이는 사우나에서 광고회사 직원 유마를 만나 그의 집에서 동거하게 되는 나오토,

그리고 엄마의 바람기로 오키나와로 도망 온 이즈미 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 다나카.

 

하나같이 본명도, 이력도 분명치 않은 존재들이라 그들과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습니다.

우연처럼 그들의 이미지는 공개수배 프로그램에 등장한 범인의 인상과 비슷합니다.

의심은 사소한 데서 출발하게 되고,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절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공포는 의심을 무한대로 증폭시키고, 증폭된 의심은 예상치 못한 파국을 초래하고 맙니다.

 

● ● ●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항간에 떠도는 살인사건 수배범과 비슷한 인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가 의심스럽고 무섭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 작품의 제목은 부부 살인범이 현장에 피로 남긴 두 글자 분노에서 따온 것이지만,

정체를 밝히지 않는 상대방에게 드는 분노라는 감정,

그런 상대방을 계속 의심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라는 감정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부부 살인범을 쫓는 미스터리의 골격을 지니고 있지만

주된 서사는 이처럼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가출을 밥 먹듯 하며 몸과 마음을 망쳐버린 아이코의 아버지 요헤이는

딸에게 희망과 안식을 주는 다시로를 믿고 그가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지만

과거를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 그에 대한 의심이 자라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살인범이라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딸의 인생은 복구불능이 되기 때문입니다.

쾌락에 몸을 내맡기고 살던 유마는 겉으론 당당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게이입니다.

그런 그가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싶어진 나오토를 만나 삶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나오토가 살인범이라면, 그래서 그가 체포된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기득권은 물론 삶 자체가 파탄날 수도 있습니다.

엄마의 바람기 때문에 야반도주하듯 오키나와로 흘러들어온 이즈미에게

외딴 섬에서 만난 다나카는 신비하면서도 의지처가 되는 인물입니다.

뭔가 사정이 있어 보이지만 이즈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머물던 외딴 섬에 남겨놓은 흔적은 이즈미를 큰 혼란에 빠뜨립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야기하는 딜레마는 거의 도박에 가깝습니다.

어중간한 타협이란 없으며 전적으로 도 아니면 모인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세 남자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은 결과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게임 앞에서

때로는 무력감을, 때로는 자기혐오감을 느끼며 선뜻 베팅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세 남자의 이야기는 제각각의 궤도를 위태롭게 달리다가

마지막에 살인범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동시에 각각의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범인을 쫓는 형사에게도 비슷한 딜레마를 던져줌으로써

세 남자의 이야기와 병행하는 또 다른 긴장감을 제공합니다.

유기 고양이 때문에 인연을 맺은 여자와 점차 깊은 관계에 빠져들지만

그는 그녀에 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찰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도 있지만 그녀를 믿어보기로 결심합니다.

세 남자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채 수사에 참여하는 그를 지켜보는 것은

한편으론 그 끝이 궁금해지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워 견딜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요시다 슈이치가 펼쳐놓은 설정은 이해하기 어렵지도, 예상하기 힘들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짐작한 대로 흘러가지만,

막상 엔딩에 이르러 마음에 와 닿는 무게감은 짐작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수배범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특별한 설정이지만

그로 인해 겪는 딜레마나 갈등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그런 감정들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으면서도 120%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분노를 다루되 분노 자체를 문장 속에 우겨넣지 않습니다.

분노는 고스란히 독자 스스로 느낄 몫으로 남겨놓습니다.

마음이 느끼는 무게감이 짐작 이상으로 묵직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역시 요시다 슈이치, 라는 평이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그의 고유한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날이 조금 서늘해졌을 때 읽었다면 엔딩에서 느낀 묵직함이 조금은 덜 부담스러웠겠지만

고온다습한 날씨 덕분에 분노라는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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