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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강직한 경찰이자 자상함과 애정으로 가득 찬 존경의 대상이던 아버지가 부패경찰이었음을 고백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이후 소니의 세계는 완전히 붕괴되고 마약으로 오염되고 맙니다. 안정적인 마약 확보를 위해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복역하는 삶을 선택한 소니는 12년 만에 아버지의 죽음에 전혀 다른 진실이 숨어있음을 알아내게 됩니다. 탈옥에 성공한 소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연루된 자들을 하나씩 처단하며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소니 아버지의 절친이자 동료였던 시몬 케파스는 아들이나 다름없는 소니의 범행을 막기 위해 규칙을 깨고 월권행위를 서슴지 않으며 수사에 뛰어듭니다.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악의 축을 쫓는 소니의 폭주는 오슬로 전역에 끔찍한 연쇄살인의 공포와 함께 ‘범법자를 제거하는 지옥에서 온 천사’라는 찬양을 함께 불러일으킵니다.
아버지의 자살로 나락에 떨어졌던 소니가 아버지의 죽음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해 피로 얼룩진 복수극을 펼친다는 심플한 구도의 이야기지만, 감질날 정도로 찔끔찔끔 패를 보여주며 긴장감을 폭증시키는 구성과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소니의 복수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막강 조연들 덕분에 뒤로 갈수록 이야기는 쫄깃해지고 도대체 베일 속의 인물이 누구일지 너무 궁금해집니다. 특히 양파 껍질처럼 드러나는 추악한 진실들을 거쳐 막판에 드러나는 반전은 진실 찾기의 완성을 넘어 안쓰럽고 애틋한 여운까지 남겨줍니다.
거미줄처럼 얽힌 악의 사슬을 규명하는 소니의 복수극이 메인이지만 요 네스뵈는 그 외에도 매력적인 여러 가지 볼거리를 장착해놓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찬란한 12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했던 소니를 위로하기 위해 설정된 멜로라인은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뭉클하고 절절한 시퀀스입니다. 키스마저 어설픈 동정이나 다름없는 소니가 난생 처음 사랑을 느끼는 장면에서는 그가 교도소에서 보냈던 12년을 어떻게든 되돌려주고 싶을 만큼 마음이 아파지기도 합니다.
또,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궁합이 잘 맞는 퇴임 직전의 고참 형사 시몬과 신참 여형사 카리의 콤비 플레이도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경찰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관리직으로의 신분상승을 꿈꾸는 카리는 오직 형사의 길을 고집해온 시몬에게는 결코 탐탁지 않은 존재지만 의외로 뛰어난 자질과 의욕을 보이는 그녀에게서 시몬은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기도 합니다.
시몬은 비주얼이나 스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왠지 해리 홀레의 향기를 풍기고 있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해리 홀레와 비교하면서 보게 만드는 재미를 던져줍니다. 해리가 술 때문에 고생했다면, 시몬은 도박 때문에 인생에 치명타를 입은 경험이 있습니다. 상관에게 미움 받기 딱 좋은 강직함과 반골로 똘똘 뭉친 기질적 공통점도 있지만, 사건을 대하는 예리한 촉, 사소한 단서도 놓치지 않는 치밀함, 거침없는 독설과 따뜻한 인간미를 겸비한 카리스마도 해리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간간이 한 인물의 복잡다단한 의식의 흐름과 감정에 대해 조금은 현학적인 수사까지 동원하여 장황하게 묘사한 점도 해리 홀레 시리즈를 연상시키는데, 가끔 몇 번씩 되읽어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도 있지만, 소니가 애증과 그리움의 대상인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이나 시몬이 도박으로 망가진 자신의 삶과 시력을 잃어가는 아내 때문에 심하게 자책하는 장면은 요 네스뵈 식 감정 묘사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중환자실에 입원한 해리 홀레의 아버지가 등장했던 ‘레오파드’가 자주 떠올랐는데, 특별한 공통점이나 유사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에 대한 아들 해리의 애증이 많은 분량에 걸쳐 심도 있게 묘사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요 네스뵈의 삶에도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나 애증이 제법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까지 한 번에 달릴 만큼 재미있게 읽었지만, 일부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약간은 작위적 냄새가 나는 캐릭터 설정인데, 복수의 화신 소니는 그 어떤 장벽이나 위기도 쉽게 넘어서는 슈퍼맨 캐릭터였고, 악의 축으로 설정된 인물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날 정도로 언터처블에 가까웠습니다. 시몬을 포함한 나머지 주, 조연들이 워낙 사실감 있게 묘사된 덕분에 선과 악을 대표하는 두 인물의 비현실감이 어느 정도 상쇄되긴 했지만, 읽는 동안 여러 지점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엄연한 스탠드얼론임에도 불구하고 해리 홀레의 향기가 느껴진 것은 저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해리 홀레를 그리워한(?) 나머지 대리만족을 맛보고 싶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해석하거나 이입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개인적으론 스탠드얼론이라 좋았고, 해리의 향기가 나서 더 좋았던 작품입니다. 새로운 스탠드얼론이나 ‘데빌스 스타’의 후속작을 벌써부터 기대하는 건 너무 과욕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