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 3 - 에이전트 6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특별한 장치가 있다 하더라도 호기심에 몸이 달아오를 뿐, 실제로 그 장치를 이용하겠다고 나설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장밋빛 미래보다는 초라하게 늙어버린 우울한 미래가 보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제게 그런 특별한 장치가 있었다면, 또 이 작품의 주인공 레오 데미도프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강제로라도 1981, 58살이 된 그의 미래를 보게끔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레오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지라도 반정부 인사나 무고한 시민들을 체포하며 유능한 정보기관 요원으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58살의 레오가 등장하는 에이전트 6’의 이야기는 그에겐 지옥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시리즈 2편인 시크릿 스피치에서 레오는 요원으로 활약했던 과거의 행동 때문에 복수 세력의 타깃이 되어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큰 위험에 빠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무리 후회하고 반성해도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가 부활할 리 없고, 유족들의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레오는 비겁한 변명 대신 진심으로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 했고, 그 일환으로 자신 때문에 부모를 잃은 조야와 엘레나 자매를 입양했습니다. 헌신과 사랑으로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그의 소망은 복수 세력의 등장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지만 레오와 아내 라이사는 목숨을 건 여정 끝에 겨우겨우 부서진 가족을 봉합했습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65. 레오는 42살의 중년이 됐고, 공장 중간관리자라는 초라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팽팽하던 그해 여름, 두 나라의 청소년들이 뉴욕의 UN본부에서 화해의 콘서트를 열기로 했고, 아내 라이사가 인솔 교사로, 딸 엘레나가 소련 학생대표 자격으로 참석합니다. 레오의 불길한 예감대로 콘서트 당일 UN본부 앞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레오는 또다시 견딜 수 없는 깊은 심연에 빠지고 맙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81년에야 레오는 비극의 현장인 UN본부 앞에 도착합니다. 그 사이 레오는 숱한 고난과 자괴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국으로의 망명을 위해 국경을 넘다가 체포되는가 하면, 마약에 취한 채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호수로 걸어 들어가기를 반복하기도 했고, 소련이 침공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능한 정보 요원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58살의 초라한 모습으로 16년 전 비극의 진실을 찾기 위해 미국 땅을 밟은 것입니다.

 

어디에선가 에이전트 6’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는 서평을 읽은 적이 있는데, 실제로 몇몇 장면에선 끝없는 시련으로 만신창이가 된 레오를 보며 목이 잠기기도 했습니다. 공산당에 충성하며 유능한 요원으로서 숱한 사람들을 수용소로 보냈던 그의 젊은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과 만족을 느낀 시간들이었습니다. 레오는 그 시간들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하고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자들에게 사죄했지만, 그런 선택은 오히려 그를 시대가 낳은 최악의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마지막 챕터를 펼치면서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레오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처럼 비현실적인 슈퍼맨이 돼서라도 그에게 비극을 안긴 악의 세력을 철저히 응징하는 장면이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돼야 평생을 자책과 자괴, 눈물과 고통으로 살아온 레오에게 조금이나마 안식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웃는 얼굴로 마무리 될 수 없는 레오의 인생이지만, 톰 롭 스미스는 그래도 그에게 행복한 눈물을 흘릴 기회를 남겨줍니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시크릿 스피치가 만족보다는 아쉬움을 많이 남긴 탓인지 에이전트 6’에서는 기대 이상의 보상을 받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 속에 맥없이 휘말리듯 서있던 레오의 모습은 긴장과 스릴 속에 연쇄살인의 진상을 파헤치던 차일드 44’에서의 존재감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스탈린 시대부터 30여 년의 고된 현대사를 헤쳐 온 거대한 서사의 주인공으로서의 무게감은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고, 그동안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함축시킨 듯한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의 눈물은 어설픈 해피엔딩보다 훨씬 더 많은 여운을 남겨줬습니다.

 

차일드 44’를 읽고 2년이 지난 뒤에 두 편의 후속작을 연이어 읽어서 그런지 새삼 차일드 44’를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다시 읽다 보면 정의롭고 인간적인 청년 레오에게 나에게 특별한 장치가 있고, 그것을 통해 당신의 미래를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그의 앞에 놓인 미래를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것 같습니다. 물론 레오 역시 그 특별한 장치를 절대 쓰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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