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 2 - 시크릿 스피치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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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953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무대로 한 시리즈 첫 작품 차일드 44’에서 냉혹하고 가차 없는 임무수행으로 일찍이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정보기관 요원 레오는 소년소녀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반역자로 낙인찍힐 위기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고, 그 공을 인정받은 레오는 시크릿 스피치의 시간적 배경인 1956년 현재, 비공식 조직이긴 해도 살인수사과에서 당당히 범죄수사를 맡고 있습니다.

 

1956년은 소련에서 큰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스탈린 사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로 불리기도 했습니다)20차 공산당 대회 비공식 석상에서 스탈린을 정면 비판하는 충격적인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의 파장은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소련 내부의 치열한 권력 갈등은 물론 동유럽에서의 끔찍한 유혈사태까지 초래했습니다. ‘시크릿 스피치는 바로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을 지칭하는 제목인데, 스탈린 집권 시절 국가에 의해 자행된 체포, 고문, 처형 등 구체적인 정황이 적힌 문서가 연설문과 함께 누군가에 의해 여기저기 배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연설문의 배포와 함께 과거 폭압적인 독재에 희생됐던 자들의 복수로 추정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권력집행자들이 차례로 목숨을 잃는데, 당시 유능한 정보기관 요원이었던 레오 역시 그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7년 전, 레오로 인해 남편과 태아까지 잃었던 한 여자가 레오 앞에 나타나 그의 가족을 위협하며 수용소에 갇혀 있는 자신의 남편을 구해올 것을 요구합니다.

 

흐루쇼프 연설이 초래한 사회적 혼돈과 복수의 퍼레이드, 그리고 거기에 레오와 그의 가족들이 숙명처럼 말려든다는 설정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아무리 레오가 과거를 청산했다고 해도 그가 남긴 상처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를 향해 복수하려는 자들을 악당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좋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연루된 사건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자매를 입양하여 죄책감을 보상받고 싶었지만 오히려 부모를 죽인 원수로 낙인찍힌 채 증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레오의 처지는 안쓰러움과 함께 시한폭탄 같은 긴장감을 고조시킨 설정입니다.

 

하지만 시리츠 첫 편인 차일드 44’의 후광이 너무 커서였을까요? 매력적인 초반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페이지는 잘 넘어가지 않았고, ‘차일드 44’에서 만났던 카리스마 넘치는 레오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런 탓에, 개인적으로 시크릿 스피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또 유일한) 이유는 현실감 부족한 사건과 인물들입니다. 레오가 지키려는 가족은 절대 그에게 협조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증오와 불신을 지닌 채 그를 죽일 생각까지 품습니다. 갈등 자체가 수긍 가능한 선을 넘어서자 뭐 하러 자신을 증오하는 가족을 구하러 저렇게까지 애를 쓸까?”라는, 반발심 섞인 의문이 수시로 들곤 했습니다.

, 평범한 인물들이 갱단 보스 혹은 치명적인 살수(殺手)가 된다는 설정도 레오의 가족 지키기만큼이나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작위적이었던 건 역시 부자연스러운 해피엔딩입니다. 수백 페이지에 걸쳐 눈덩이처럼 불어난 갈등을 억지로 봉합한 것은 차일드 44’얼음 속의 소녀들에서 봤던 작가의 필력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가족을 찾기 위해 레오가 뛰어들어야 했던 무수한 난관들 역시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탈출해도 주변의 냉혹한 자연환경 때문에 살아남을 길이 없는 최악의 수용소, 그곳으로 가기 위해 차가운 폭풍과 끔찍한 폭력에 맞서야 했던 수송선에서의 여러 날들, 전운이 감도는 헝가리까지 날아가 벌이는 가족 찾기와 복수극의 공허한 하이라이트 등 스케일과 액션을 위해 무리하게 시공간을 확장시킨 듯한 설정들은 장면 하나하나는 매력적이었지만, 정작 앞뒤 맥락까지 고려해서 되읽어보면 이야기의 쫀쫀함과 사실감을 떨어뜨린 과대포장일 뿐이었습니다. 캐릭터나 사건에서 과대포장만 걷어냈다면 전작인 차일드 44’ 못잖은 매력을 유지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은 더 배가됐습니다.

 

시크릿 스피치자체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전작이 남긴 기대감 때문에 더 큰 실망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톰 롭 스미스의 필력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닌 만큼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에이전트 6’에서 작가와 주인공의 진짜 매력을 재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하려 합니다. 무엇보다 레오의 마지막이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서라도 당장 에이전트 6’를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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