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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오렌지와 햇빛, 맑고 싱그러운 지중해성 기후가 떠오르는 캘리포니아지만, 거기에 덧붙여 그곳에서의 ‘완벽한 하루’라니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인 타이틀입니다. 모래사장에 놓인 모포와 먼 수평선이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표지 역시 캘리포니아 해변의 멋들어진 낭만을 한껏 거들어줍니다.
하지만, 수록된 62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타이틀이 무색하리만치 전혀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원제인 ‘Revenge of the Lawn’(잔디밭의 복수)이 62편의 이야기를 잘 대변하고 있다면, 번역제목인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는 무척이나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낯선 작가의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에세이가 아닐까, 하는 호기심과 나른하고 낭만적인 캘리포니아의 완벽한 하루에 대한 기대는 보기 좋게 배반당합니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눈에 띄는 작가의 이력 - 극도의 가난, 정신병원에서의 전기충격 치료, 비트작가의 본거지에서 펼친 반문화운동, 49세에 홀연히 감행한 권총 자살 등 - 도 그렇고, 그의 대표작인 ‘미국의 송어낚시’에 대한 소개 - 강렬한 반체제 정신, 기계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를 다룬 작품 - 를 보면 수록된 62편의 이야기가 결코 평범한 에세이가 아님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유년기이던 1930년대부터 20~30대를 보낸 1960년대에 쓰인 엽편 또는 단편들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딘가 세기말 같은 ‘건전하지 못한 정서’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 속 해프닝을 지독할 정도로 시니컬하게 풀어낸 이야기(‘잔디밭의 복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 ‘그레이하운드의 비극’), 빈곤과 하위문화가 발산하는 쓸쓸하거나 염세적인 냄새로 가득 찬 이야기(‘독일과 일본의 완전한 역사’, ‘미친 노파들이 오늘날 미국의 버스를 탄다’), 유년기에 겪은 2차 대전이 남긴 기억들(터코마의 유령 아이들), 판타지를 동원하여 작렬하는 풍자를 선보인 이야기(‘샌프란시스코 YMCA에 바치는 경의’)가 주류이고, 누구에게도 읽힐 생각이 없는 것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쓴 듯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캘리포니아에 대한 사랑이 담뿍 묻어나는 다양한 이야기나 사소한 반전으로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이야기도 수록돼있습니다.
제일 인상 깊게 읽은 건 표제작인 ‘잔디밭의 복수’인데, 사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웃음을 참지 못하곤 했지만, 해설을 통해 알게 된 이 작품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자유주의와 목가주의를 상징하는 파괴된 잔디밭,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기계문명과 물질주의에 복수하는 자연의 섭리는 우화이면서 동시에 그 어떤 직설적인 비판보다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에 상식을 뛰어넘는 스토리가 펼쳐지곤 해서 간혹 난해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과 마주칠 때가 있는데, 이건 아마도 당시 미국의 문화적, 사회적 특성에 대한 무지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반문이 절로 생각나는 작품도 꽤 있는 편이고, 작가 이력을 보고 나름 각오를 다진 독자 가운데에도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적잖을 것 같습니다.
수록된 62편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앞서 언급한 몇몇 작품들은 엽편 또는 단편으로서의 매력과 함께 시대와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 비판, 독설을 담고 있어서 나름 인상적인 책읽기가 됐습니다. 반전(反戰), 히피, 마약, 비틀즈 등 1970년대 미국의 안티 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작품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텍스트가 돼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