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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헤일리 태너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브루클린의 러시아 이민자 슬럼가에서 섬처럼 고립된 채 성장하던 바츨라프와 레나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천진난만함과 자유분방함을 잃지 않으며 먼 훗날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능가하는 마술사와 조수가 되기를 꿈꾸는 소년, 소녀입니다. 그들은 5살에 만나 서로를 자신의 우주라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10살이 된 어느 날 레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영문 모를 이별을 겪었다가 몸과 마음이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17살이 되어 운명적으로 재회합니다. 하지만 내내 서로를 잊지 못하던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은 금세 먹구름에 뒤덮이고 맙니다. 해제돼선 안 될 봉인처럼 7년 동안 묻혀있던 ‘레나가 사라졌던 그날의 진실’이 폭로되면서 바츨라프와 레나는 대혼란에 빠지고,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맞이할 위기에 처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대단히 무겁고 심각한 미스터리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은 제목의 느낌 그대로 소년과 소녀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주변 어른들의 캐릭터, 또 10살이라는 나이에 겪은 끔찍한 상처와 이별 이야기로 인해 한편으론 잔혹동화의 정서를 지닌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아무런 위장도, 이기심도 없는, 그래서 맑고 순수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무엇이 숨어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원시림 같은 위험한 모습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높이를 이해할 수 없는, 또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은 때론 선의로, 때론 악의 그 자체로 소년과 소녀의 삶에 개입합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기준과 도덕을 옳다고 믿으며 소년과 소녀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하기도, 억지로 갈라놓기도 하지만 끝내 거스를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인력까지 멋대로 통제하진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을 지키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운명 같은 사랑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거나 그에 관한 기억을 상실한 독자에게는 이 작품은 일종의 판타지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황순원의 ‘소나기’가 그랬듯 바츨라프와 레나의 10여 년에 걸친 사랑, 이별, 재회는 어린 아이들의 풋풋하고 철없는 불장난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을 전해줍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어른들이 쳐놓은 장막을 넘어서는 바츨라프와 레나의 사랑은 어쩌면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애틋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밋빛 미래를 기약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되지만 누구나 다 두 사람이 앞으로 한참은 더 폭풍 속을 헤매야 할 운명임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소년과 소녀의 성장+러브스토리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한없이 가벼운 사랑이 난무하고 ‘운명=허구’라는 등식이 당연시 되는 시대에 바츨라프와 레나의 마법 같은 이야기는 그 또래인 10대부터 중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자층을 아우르는 ‘사랑에 관한 판타지’로 분류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