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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련
미셸 뷔시 지음, 최성웅 옮김 / 달콤한책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제목과 표지만큼 몽환적인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인상주의 거장 클로드 모네가 30여 년간 ‘수련’ 연작을 그리며 칩거했던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를 무대로 세 여인의 사랑, 운명, 절망, 그리고 그녀들을 둘러싼 광기와 집착을 그려낸 ‘검은 수련’은 모호하면서도 궁금증을 일으키는,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불온함을 담은 프롤로그로 시작됩니다.
“한 마을에 세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 첫 번째는 심술쟁이, 두 번째는 거짓말쟁이, 세 번째는 이기주의자. 세 명은 완전히 달랐지만 남몰래 같은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건 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규칙은 잔혹했다.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 다른 둘은 죽어야 했다.”
천재적인 그림 재능을 가진 11살의 파네트 모렐은 미술 콩쿠르에 입선함으로써 지베르니를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36살의 나이에도 상대를 압도하는 매력을 지닌 여교사 스테파니 뒤팽은 단 한 번 찾아온 불같은 사랑을 통해 감옥이나 다름없는 지베르니를 떠나려 합니다. 80대에 접어든 ‘나’는 마을 일대를 완벽하게 관찰할 수 있는 방앗간의 5층 망루에서 지베르니를 떠나려는 두 여인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들의 불행한 운명을 예감합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어딘가 생명감을 잃은 듯한 지베르니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베르농 경찰서의 로랑스 서장과 보좌관 실비오가 수사에 뛰어듭니다. 바람둥이이자 모네의 그림을 손에 넣으려 혈안이 됐던 피살자 주변을 조사하는 한편, 현장에서 발견된 11살 아이의 생일 축하엽서를 단서 삼아 수사를 진행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유력한 용의자마저 풀어줘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한국에 먼저 소개된 미셸 뷔시의 ‘그림자 소녀’가 치밀한 구성과 리얼한 서사를 내세웠다면 ‘검은 수련’은 미술,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바탕에 깐 채 사랑과 욕망, 광기와 집착 등 인간 본연의 감정을 상징적이고 몽환적으로 접근한 작품입니다. 독자는 경찰 콤비 로랑스와 실비오의 수사에 몰두하며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어느 지점에 이르면 사건보다는 지베르니를 벗어나려는 세 여인의 욕망에 집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 아름다운 그림 같은 지베르니에 대한 묘사에 빠져있다가도 어느 순간 감옥처럼 답답하고, 껍데기만 남은 듯한 지베르니의 현실을 목도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연상시키는 두 경찰 콤비의 대화에 빙긋 웃다가도 세 여인의 내면 묘사를 위해 동원된 상징으로 가득 찬 시구(詩句)를 보고 있으면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몇 번씩 되읽으며 그 의미를 여러 번 곱씹게 됩니다.
독자에 따라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서술들을 어렵거나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는데, ‘검은 수련’을 통해 미셸 뷔시를 처음 만나는 독자들은 자칫 ‘전형적인 난해함으로 중무장한 프랑스 작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소녀’의 대중적 성공 이후 재조명되면서 평단의 호평과 다양한 수상 이력을 쌓은 것을 보면 ‘검은 수련’이 결코 편하고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검은 수련’의 진가는 흩어졌던 퍼즐 조각들이 서서히 한곳으로 모여드는 중반부터 긴장감과 속도감을 높이면서 빛나기 시작하는데, 살인사건의 진상과 지베르니를 벗어나려는 세 여인의 진실이 드러나는 엔딩에 이르면 놀라운 반전과 충격이 연이어 폭발하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독자는 미셸 뷔시가 왜 이토록 ‘복잡 미묘한 서술’과 ‘예술적 서사’를 고집했는지, 앞서 동원된 수많은 상징과 표현들이 왜 필요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검은 수련’은 미스터리와 트릭, 비밀과 거짓말이 너무나도 촘촘하고 세밀하게 설정돼있어서 자칫 한 줄 소개만으로도 대형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상세한 줄거리나 캐릭터 소개보다는 애매모호한 인상 비평에 가까운 서평 밖에 쓸 수 없었는데,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가능하면 소개글이나 서평을 접하지 말고 백지 상태에서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혹시 ‘검은 수련’이 어렵게 느껴졌더라도 미셸 뷔시를 포기하지 말고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그의 ‘그림자 소녀’ 만큼은 꼭 한번 만나볼 것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