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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 새벽의 주검
디온 메이어 지음, 강주헌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의 액션스릴러’라는 타이틀은 미지의 대상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먹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하게 만드는 난생 처음 보는 음식 같은 낯설음을 더 강하게 심어줬습니다. 하지만 디온 메이어가 풀어낸 이야기는 의외로 흥미와 만족을 선사했고, 후속작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할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제도)가 악명을 떨치고, 독립운동이 불붙었던 70년대 아프리카 상황과 여전히 흑백 갈등이 상존한 채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90년대 후반의 남아공을 배경으로 디온 메이어는 수많은 목숨을 거둬갔던 참혹한 사건들의 진상 추적과 한 개인의 상처투성이 성장사 및 연애담 등 다양한 서사를 적잖은 분량 속에 녹여냈습니다.
장래가 보장된 프로파일러와 교수의 자리를 포기하고 현장 경찰의 길을 택한 판 헤이르던은 끔찍한 비극을 겪은 뒤 경찰을 그만뒀고, 지금은 극심한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초보 사립탐정으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여성 변호사 호프 베네커를 통해 앤티크 가구상 얀 스미트 살해사건을 맡은 판 헤이르던은 대형 금고 속의 물건과 함께 사라진 피살자의 유언장 찾기에 나섭니다. 주어진 시간은 단 1주일. 하지만 실타래를 풀수록 사건의 규모는 커져가고, 군 정보국에 미국 정보기관까지 가세하면서 판 헤이르던은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고 맙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판 헤이르던이 맡은 ‘유언장 찾기’이고, 또 하나는 유년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판 헤이르던의 성장사와 로맨스입니다. 한 챕터씩 번갈아 진행되는 두 이야기는 언뜻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그의 성장사 중 경찰이 되고자 마음먹은 지점부터 서서히 교집합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뒤틀리게 한 경찰 시절의 끔찍한 비극의 전말이 공개되는 순간 독자는 작가가 두 갈래의 전개를 선택한 이유와 노림수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사건은 사건대로 눈덩이처럼 확장되다가 예상외의 결말을 맞이하고, 개인사는 개인사대로 한 인간의 굴곡진 인생경로를 보여주다가 뜻밖의 반전에 도착하는데, 두 가지 서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섞어놓은 작가의 필력은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었고, 두 서사의 마무리 역시 재미와 여운을 겸비한 매력적인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유언장 찾기에서 시작되어 오래 전 남아공과 아프리카의 정치적, 역사적 비극이 낳은 참혹한 사건의 실체에 이르는 장대한 스토리도 재미있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됐던 엘리트 경찰이 만신창이의 삶에 이르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유독 눈길이 갔던 부분은 판 헤이르던의 삶에 개입했던 8명의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성(性)에 눈 뜨던 청소년기의 판 헤이르던을 헤집어놓았던 세 명의 여인들, 그의 풍요롭고 안정된 미래에 올라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벤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판 헤이르던이 모든 것을 걸었던 비련의 여인 노니, 유언장 사건에 개입한 판 헤이르던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올곧은 여성 변호사 호프 베네커, 판 헤이르던에게 끝없는 추파를 던지는 부유하고 파괴적인 마조히스트 카라 안, 그리고 판 헤이르던의 지붕이자 족쇄이며 동시에 멘토이자 존경의 대상인 어머니 조안 등 그를 둘러싼 8명의 여인들은 긴장감 넘치는 액션 장면 못잖게 매력적인 서사를 제공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 도덕적 기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가치관, 미래에 대한 기대 등 현재의 판 헤이르던의 인격은 이 8명에 의해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고, 연애조차 냉정함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로봇 같은 하드보일드 탐정보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또 주변의 여자들로 인해 숱하게 삶이 흔들렸던 판 헤이르던이 더 인간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독자에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무래도 스릴러의 변방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보니 적잖은 작품이 영상화됐다는 작가의 이력을 보고도 처음엔 그다지 호기심이 일지 않았는데, ‘오리온’을 읽은 뒤엔 후속작에 대한 관심은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 작가임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여 판 헤이르던을 도와줬던 코사족 출신의 흑인 토벨라 음파이펠리가 후속작 ‘프로테우스’의 주인공이라고 하니 더욱 기대감이 들기도 합니다. 더불어,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었다는 네 편의 ‘베니 그리설 시리즈’ 역시 머잖아 한국에서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