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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스위스 국민작가이자 세계적인 극작가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그가 남긴 추리소설은 단 네 편뿐입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에 따르면 “극작가로 대성하는 시기를 얼마 앞두지 않은 때 ‘밥벌이’를 위해 추리소설을 썼고, 그 이후로는 다시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약속’은 그 중 두 편 - 표제작인 중편 ‘약속’과 단편 ‘사고’ - 을 수록한 작품집으로, 1950년대에 집필된 두 편 모두 일반적인 추리소설 서사와는 거리가 먼 무척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표제작인 ‘약속’에는 '추리소설에 부치는 진혼곡'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말 그대로 추리소설의 주류 경향에 대한 명백한 도전 또는 비꼼을 품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추리소설 안에서 엉뚱한 사기극이 연출된다는 점입니다. 무릇 사건이란 수학 공식처럼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순전히 직업상 운이나 우연이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흔하지요. 그런데 소설 속에서는 이 우연이라는 것이 아무 역할도 못하지요. 당신네들은 사건 진행을 논리적으로 설정하지요. 그렇게 세워진 세계는 아마도 완전한 세계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거짓 세계입니다.”
‘약속’에 등장하는 전직 경찰국장이 명망 있는 추리소설가를 향해 내뱉은 일갈입니다. 추리소설의 비현실성과 동화적인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전직 경찰국장은 현실에서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의 사례를 9년 전에 벌어진 소녀 연쇄살인사건을 들어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사례의 내용이 ‘약속’의 주된 스토리입니다. 완벽한 스펙을 지닌 한 경찰이 장밋빛 미래를 포기하고 범인을 쫓지만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얽혀 허우적거리다가 참담하게 실패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의 진상은 우연의 도움을 받아 엉뚱한 곳에서 밝혀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르긴 해도 추리소설 속 비현실적인 명탐정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겪어본 현업 경찰과 형사라면 대환호를 보낼 듯 싶습니다. “이게 진짜 현실이야!”라며 말입니다. 아마 명망 있는 추리소설가가 이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면 ‘완벽한 스펙을 지닌 경찰’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치밀하게 설계된 연쇄살인을 멋들어지게 해결했을 겁니다.
하지만 ‘약속’은 단순히 “픽션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도식적인 주장을 넘어 ‘기존 추리소설의 인습을 깨고 미묘한 추리적 요소를 가미한 새로운 추리소설’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깔끔한 주인공 대신 ‘잔인한 우연에 조롱당하며 파멸해가는 주인공’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건 이면의 현실을 들여다보게 만드는가 하면, 진부하고 뻔한 권선징악의 공식 대신 인생의 아이러니라든가 씁쓸한 운명의 장난을 지켜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 번째 수록작 ‘사고’는 ‘재판 놀이’를 소재삼아 인생의 급반전을 겪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서스펜스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퇴직한 판사, 검사, 변호사가 별장 숙박객을 피고인으로 세워놓고 하룻밤의 유쾌한 재판 놀이를 벌이는데, 재판이 진행될수록 주객이 전도되는가 하면, 재미삼아 즐기던 놀이가 한순간 서늘한 현실처럼 급변하면서 결국엔 아무도 예상 못한 비극적인 엔딩에 이르고 맙니다.
캐릭터와 스토리 모두 다분히 연극적인 설정이라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작가는 신이나 운명 같이 거창하고 형이상학적인 존재보다 ‘사소한 사고’ 하나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인간의 나약함이나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곁들여 놓았습니다.
고전의 올드함이 역력하지만 ‘약속’은 장르물 애호가들이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를 뒤집는 미스터리’라는 보기 드문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다 연민과 동정심 등 마음 한쪽이 먹먹해지는 색다른 여운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통쾌하고 속 시원한 엔딩을 장르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독자들에겐 다소 거북하게 읽힐 이야기겠지만 분량도 300페이지 내외로 한나절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고, 스위스 출신 독일어권 작가로는 적잖은 명성을 날린 작가의 작품인 만큼 한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