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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삼킨 소녀 ㅣ 스토리콜렉터 28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1990년대 중반, ‘전 세계에서 가장 지루한 곳’ 가운데 하나이며 주민이라곤 1,500명에 불과한 미국 네브라스카 주 소도시 페어필드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셰리든 그랜트의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말랑말랑함이나 천진난만함과 거리가 멀었던 셰리든의 성장기는 롤러코스터보다 더 아찔하고 위태로웠던 것은 물론 어른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겁고 무자비하고 잔혹했습니다.
셰리든 그랜트는 버넌과 레이첼의 양녀이자 책과 음악을 사랑하며 무한한 자유를 갈망하는 15살 소녀입니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소도시 페어필드는 그런 셰리든에겐 악몽 그 자체와도 같아서 언제라도 탈출하고 싶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한시도 쉬지 않고 악의와 저주를 퍼붓는 양어머니 레이첼의 존재는 셰리든에겐 감당하기도, 벗어나기도 불가능한 끔찍한 재앙입니다.
세 번의 여름 동안 셰리든은 여러 남자와 만남과 이별을 주고받습니다. 풋풋한 첫사랑을 지나 그리 개운치 못했던 첫 경험을 통해 성(性)에 눈을 뜬 후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의 정점을 찍은 뒤 뒤늦게야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손가락질 받거나 허락되지 않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고 매번 관습의 틀 밖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합니다.
그 와중에 셰리든은 입양아로서의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애씁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항상 든든한 보호막이었던 양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멀어지기 시작한 이유, 자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괴물’이라고 비난하던 양어머니의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의 정체와 버넌 부부에게 입양되기까지의 과정 등 자신의 출생과 성장을 둘러싼 그랜트 가문의 비극적인 과거사를 알아내게 됩니다.

“첫사랑, 첫 경험, 처음으로 맛보는 인생의 잔인함”이라는 출판사의 홍보 카피는 이 작품의 내용에 비하면 너무 얌전하거나 수수해 보이기만 합니다. 어쩌다 한 번씩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기도 하지만 셰리든에게 있어 페어필드에서의 세 번의 여름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화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또 벼락처럼 찾아온 몇 번의 사랑은 기쁨보다는 고통, 배신, 절망, 상처만 남긴 채 사라져갔고, 평범한 사람이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살인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정신적, 물리적 폭력’은 쉴 틈 없이 셰리든의 인생을 두들기며 그녀를 까마득한 심연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장르물은 아니지만 셰리든이 친어머니의 흔적을 쫓는 미스터리를 바탕에 깔아놓음으로써 넬레 노이하우스는 자신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물론 그녀의 ‘타우누스 시리즈’에 비하면 미스터리는 소소할 따름이고, 반전이란 게 등장할 틈도 없게끔 대부분의 정보를 그때그때 독자에게 제공하지만, 시종일관 긴장감을 만끽하게 되는 이유는 셰리든이 알아낸 시한폭탄 같은 그 정보들이 언제 어떤 모양새로 그녀의 ‘적’들을 향해 터질지 너무나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한폭탄이 터졌을 때의 쾌감은 ‘타우누스 시리즈’의 피아 키르히호프 형사가 산전수전 끝에 악당들을 잡아들일 때 못잖게 짜릿하고 통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유별난 조연들의 캐릭터나 출생의 비밀, 불륜, 가정폭력, 근친상간 등 셰리든이 겪는 험난한 사건들은 한국에서 ‘막장’이라고 불리는 극악스러운 드라마의 설정들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끔찍한 통과의례들을 겪으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셰리든에 대한 넬레 노이하우스의 진심어린 시선 덕분에 간혹 무리수처럼 보이는 설정조차 큰 거부감 없이 읽힌 게 사실입니다. 소재가 막장이더라도 작가의 ‘진정성’이 가미된다면 품격 있는 작품이 탄생될 수 있다는 교훈은 여러 고전을 통해 경험해봤지만, ‘여름을 삼킨 소녀’ 역시 그런 범주에 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처음엔 장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곤 약간 맥이 빠지기도 했지만, 넬레 노이하우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것 같아 다 읽고 난 후에는 오히려 반갑고 기분 좋은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년(2014년) 여름에 출간된 ‘상어의 도시’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타우누스 시리즈’의 명성에 힘입어 출간된 것 같아 읽기를 주저했는데, ‘여름을 삼킨 소녀’를 보고나니 역시 기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잖아 셰리든의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될 것 같은데, 세 번의 여름을 견뎌낸 그녀에게 어떤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