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섬, 짓하다 ㅣ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
김재희 지음 / 시공사 / 2014년 10월
평점 :
(약간 상세한 작품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살인사건 용의자를 상대로 면담과 검사를 진행하던 경찰청 프로파일러 김성호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타의에 의해 수사에서 빠지게 됩니다. 이후 상부의 권유로 삼보섬(진도) 연쇄 부녀자 실종사건을 맡아 보름 가까이 섬에 머물며 프로파일링은 물론 현지 경찰과의 공조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냅니다.
네티즌에게 마녀사냥을 당하던 한 여성이 처참하게 살해된 사건, 아무런 공통점도 찾아볼 수 없던 삼보섬의 세 여성이 연이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사건, 그리고 프로파일러 김성호의 10대 시절의 트라우마와 고통스러운 기억 등 세 갈래의 이야기가 제각각 진행되다가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연결고리를 드러내며 무서운 진실을 드러냅니다.
‘크리미널 마인드’ 등 미드를 통해 익숙해진 프로파일러의 활약상을 한국 미스터리 소설로 만나볼 수 있게 돼서 기대감이 꽤 컸습니다. ‘섬, 짓하다’는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는 프로파일러의 활약만이 아니라 주인공 김성호의 끔찍한 개인사까지 포함하는 제법 큰 서사를 펼쳐놓습니다. 또한 엘리트 프로파일러부터 다혈질의 현장 형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찰 캐릭터는 물론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조연들 하나하나에게까지 공을 들인 점도 그렇고,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이 돋보이는 촘촘한 밑그림이나 예상을 넘어선 반전 등은 처음 만나본 김재희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증거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읽기 전부터 프로파일러가 주인공인 미스터리가 미드를 통해 한껏 높아진 한국 독자들의 눈높이를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인데, 실제로 작품을 읽는 도중 적잖은 곳에서 이런저런 아쉬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프로파일링 자체와 관련된 아쉬움이 제일 컸는데, 좀 매크로하게 얘기하자면, 프로파일링에 관한 ‘지식’들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한 채 겉돌면서 독자에게 강의 내용처럼 주입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성호가 설명하는 프로파일링 결과는 경험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강의실에서 배운 내용’을 억지로 현실에 적용하는 듯 보였습니다.
또한 프로파일링 자체가 ‘확정’이 불가능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김성호는 담당 형사에게 “그는 범인이 아닙니다.”라는 단정적인 발언을 합니다. 이런 태도는 현장 형사와의 불가피한 충돌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데, 김성호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 형사의 답답함에 더 공감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아마 작가는 김성호의 능력과 경험과 다양한 프로파일링 기법을 보여줄 의도였겠지만, 조금은 단정적이거나 ‘외워서 발표하는 교과서 속의 지식’처럼 묘사돼서 그런지, 그 의도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적잖은 양을 할애하여 김성호의 과거와 현재, 외모와 캐릭터를 설명했지만, 정작 작품을 다 읽은 뒤에도 김성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떠오르지 않은 점도 아쉬웠습니다. 대인 기피증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트라우마에 갇힌 지독히 내성적인 성격 같기도 하고, 소심한 학자인가 싶으면 간혹 다혈질을 발휘하여 전혀 다른 인격처럼 보이기도 하고, 툭하면 상대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덕분에 하드보일드 캐릭터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한때 여자들한테 꽤 인기 있었던 멋진 남자 같기도 하고... 뭐랄까, 그를 설명한 퍼즐 조각들은 무수한데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어쩌면 한 인물에게 너무 많은 캐릭터를 집어넣으려다 발생한 부작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별 세 개밖에 주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작위적이거나 어설퍼 보이는 디테일들 때문입니다. 김성호가 활약할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 일부러 부실하게 이뤄지는 것만 같은 경찰의 초동수사, 범행 관련 장소마다 넉 달도 지난 CCTV 영상들이 빠짐없이 고스란히 보관돼있는 점, 국과수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필적감정을 위해 굳이 국립민속박물관 소속 학예사가 사건에 개입하는 점, 지도만 봐도 짐작 가능한 범행의 지리적 특징을 굳이 컴퓨터로 돌려보는 점, 경력 20년이라곤 믿을 수 없는 충동적이고 초보 티가 역력한 베테랑 형사의 태도, 수상한 인물을 여러 번 마주치고도 특별한 이유 없이 일부러 방치하는 듯한 모습 등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사소한 부분들이지만 오히려 그런 ‘사소함’ 때문에 읽는 내내 잔가시들이 목에 잔뜩 걸려있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맥이 빠졌던 것은 마치 ‘빅 브라더’처럼 모든 것을 설계했던 초인적인 범인의 능력인데, 비유하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랜덤한 상황들을 모조리 예측해내는 대단한 예지력의 소유자라고 할까요? 작가의 의도는 범인의 인상을 강렬하게 만들고 그가 지닌 뿌리 깊은 증오심을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론 막판에 이야기의 현실감만 떨어뜨리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라는 부제를 보면 앞으로 후속작이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일개 독자의 의견에 불과하지만 후속작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몇 가지 당부하자면,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프로파일링, 자연스럽고 선명한 캐릭터 설정, ‘막판 뒤집기’에 너무 비중을 두지 않는 이야기 구성, 매크로한 서사보다는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디테일 등에 좀더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국 장르물을 사랑하는 독자 입장에서 도진기의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못잖은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의 성공을 기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