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지옥 이타카
유메노 큐사쿠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유메노 큐사쿠의 대표작 도구라 마구라3대 기서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솔직하게 고백하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나 한줄 평에서 얻은 편치 않은 정보들에 부담을 느껴서 그동안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작가에 대한 관심까지 끊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조금은 부담 없이 유메노 큐사쿠와 만나고 싶어 선택한 작품이 소녀지옥입니다.

제목과 표지가 무척 강렬한 작품입니다. 특히 소녀지옥이라는 극단적인 두 단어의 조합이 주는 기대감이 컸고, 과연 소녀가 겪는 지옥 이야기일까, 소녀 자체가 지옥의 역할을 하는 이야기일까 궁금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소녀지옥이라는 표제 하에 중편 3편이 실렸고, 그 외에 독립된 단편 3편까지 모두 6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소녀지옥 3부작의 주인공들의 면면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의 간호사 히메구사 유리코는 거짓과 망상에 빠진 채 사람들을 속이고 거기에서 삶의 희열을 느끼는 천재적인 거짓말쟁이입니다. ‘살인 릴레이의 버스 여차장 도미코는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화성의 여자의 아마카와 우타에는 기형적인 자신의 몰골을 웃음거리와 노리개로 전락시킨 학교 관계자와 가족들에게 끔찍한 복수극을 벌입니다.

 

소녀지옥 3부작의 주인공들은 팜므 파탈이거나 겉으로 강한 척 자부하거나 외톨이지만 어떻게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제법 센 캐릭터들이지만, 실은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말 그대로 소녀다운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한 소녀들은 아닙니다. 그녀들은 스스로 지옥을 만들거나 자진해서 지옥으로 들어가거나 악의에 찬 타인의 지옥에 빠져 고통스러운 삶에 허우적대는데, 결국 마지막으로 그녀들이 선택한 길은 죽음을 통해 지옥을 영원히 잊거나 자신이 겪은 지옥을 타인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번역자 최고은은 후기를 통해 1930년대라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괴물이 된 소녀들지옥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언급했는데, 간략하게 편집해보면...

 

당시 사회진출을 모색하던 신여성들은 가부장제 및 현모양처 이념과 정면으로 대치했지만, 그녀들의 노력은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고, 오히려 괴물로서 지옥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하지만 소녀지옥속의 소녀들은 말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을 억압하던 남성들에게 마지막 복수에 이르기까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습니다. 말하자면, 지옥 같은 현실에 절망한 소녀들이 스스로 지옥이 되어 현실에 복수한 것입니다.”

 

세 작품 모두 편지의 형식을 사용했는데, 편지라는 매체의 특성 상 정황이나 감정이 훨씬 더 사실적이고 진정성 있게 전달됩니다. 또한 결과를 먼저 보여준 후 ’, ‘어떻게를 찬찬히 설명하는 구도를 취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형식과 구도 때문인지 강렬한 표지에서 느껴지는 직설적인 공포는 좀 덜한 편이지만, 대신 느리면서 천천히 스며드는 은근한 공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후반에 실린 3편의 단편 역시 개성이 강한 작품들인데, 주인공들은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으로선 보기 드물게 부와 권력을 소유했고 남성에 대한 폭력과 살인을 몸소 실천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녀시절의 지옥을 빠져나와 기어이 괴물이 된 여자들의 이야기라고 할까요? ‘소녀지옥 3부작과 맥이 닿아있기도, 또 떨어져있기도 한 이야기들이지만 유메노 큐사쿠의 기이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고, 특히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굴뚝은 미스터리의 느낌까지 배어있어서 제일 눈에 띄었던 작품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고전 미스터리에 비해 1930년대의 풍경과 분위기가 더 강조돼서 그런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이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비해 문화적 이질감은 더 강하게 느껴졌지만, 반대로 그 덕분에 날것 같은 근대적 아날로그의 정서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도구라 마구라에 도전할 것인지 여부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유메노 큐사쿠의 세계를 일부라도 들여다본 것은 일본 장르물을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선 꽤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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