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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트 원티드 맨 ㅣ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6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평점 :
어느 날 홀연히 함부르크에 나타난 '지상 최대의 지명수배자' 이사 카르포프. 온몸에 고문을 당한 흔적이 있고,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아 보이는 이 무슬림 청년을 민권단체에서 일하는 변호사 아나벨 리히터가 돕게 됩니다. 오래 전, 자신의 판단착오로 한 불법체류자를 정부기관에 빼앗겼던 아나벨은 사선을 넘어 독일에 온 이사의 신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를 노리는 ‘기관들’과 맞서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사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부담스러운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한편 러시아 장성 카르포프와 아버지 에드워드가 연루된 거액의 검은 돈을 관리해온 개인은행가 토미 브뤼는 어느 날 카르포프의 아들을 자처하며 검은 돈에 관해 물어오는 이사와 아나벨을 만나곤 갈등에 빠집니다. 여기에 이사를 이용하여 이슬람 테러조직을 소탕하려는 독일 헌법수호부 요원 귄터 바흐만까지 합세하면서 사건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스파이물의 거장이라는 존 르 카레와 처음 만난 작품입니다. 장르물을 좋아하면서도 스파이물은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에 어울린다는 생각에 자주 접하지 못했습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 역시 독일, 영국, 미국의 첩보기관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놓고 각축전을 벌인다는 소설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설정 때문에 읽을까 말까를 꽤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저의 선입관은 초반부터 깨졌습니다. 적절한 비유와 생략이 곁들여진 고급스러운 영국식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문장과 재기 넘치는 이야기꾼의 입담을 듣는 듯한 경쾌한 리듬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기관 측 대표선수’로 설정된 귄터 바흐만과 에르나 프레이는 데니스 루헤인의 명품 시리즈 주인공인 켄지와 제나로를 연상시킬 만큼 유쾌한 반골의 면모를 물씬 내뿜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모든 기관이 주목하는 '지상 최대의 지명수배자'인 이사 카르포프, 그를 돕는 명문가 출신의 반골 민권 변호사 아나벨 리히터, 그의 유산을 보관한 탓에 사건에 휘말리면서 아나벨에게 연정을 품는 은행가 토미 브뤼 등 매력적인 캐릭터들 덕분에 재미있는 전개와 엔딩이 기대됐습니다.
하지만 롤러코스터처럼 거칠게 달려갈 거란 예상과 달리 초반부를 벗어나자마자 이야기는 의외로 차분하고 정적인 형태로 흘러갑니다. 이사를 차지하려는 각국의 기관들의 암투와 두뇌 싸움은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긴 하지만 실제 그들의 충돌은 의외로 단순한 전략과 대리전 양상을 띨 뿐입니다. 주인공인 이사-아나벨-토미의 미묘한 3각 관계 역시 같은 자리를 맴돌며 관념적인 대화와 내적 갈등의 토로 혹은 느릿한 줄다리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민권변호사 아나벨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행동에 관한 독자들의 “왜?”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선을 넘어 독일까지 왔지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이사, 은행가로서의 직업적 의무와 개인적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주관보다는 주변 상황에 의해 떠밀려 다니는듯한 토미, 소신과 경험을 두루 갖췄을 뿐 아니라 마초 기질까지 다분한 매력적인 캐릭터임에도 결국 그런 능력들을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조연 수준에 머무른 귄터, 그리고 이사에게 테러리스트의 낙인을 찍기 위해 엄청난 인력과 계획을 준비하지만 딱히 그래야만 하는 근거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각국의 정보기관 등 등장인물들의 선명하지 못한 동기와 수동적인 태도들은 마지막 장까지 답답한 책읽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서방 문명과 이슬람을 단순한 선악의 구도로 포장하지 않은 점, 무의미하고 공상적인 해피엔딩보다 냉혹한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 전개, 이미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냉전시대에 관한 사실적인 묘사, 테러리즘을 악용하는 사악한 서방의 실체와 그 와중에 무력하게 희생당하는 개인들을 적나라하게 조명한 점 등은 이 작품을 ‘얼마 안 가 기억에서 사라지고 마는 가벼운 스파이물’과 차별화시키는 장점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 장점들은 소재나 서사에서만 빛났을 뿐 실제 이야기 속에선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그런 장점들이 좀더 재미와 대중성으로 포장되어 이야기에 반영됐더라면, 즉 작가가 조금은 통속적이고 친절했더라면, 또 사건의 한복판에 선 개인들이 좀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능동적으로 움직였더라면, 그래서 테러리즘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엔딩을 맞이했더라면 아마 출판사의 홍보카피처럼 “전통적 스릴러에 현실의 현안을 결합한 묵직한 주제와 이야기적 재미가 완벽하게 결합된 작품”이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단 한 편으로 ‘스파이물의 거장’을 판단할 순 없겠지만, 다음 작품에서도 비슷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면 더 이상은 존 르 카레의 작품을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