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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소녀
잭 케첨 지음, 전행선 옮김 / 크롭써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1958년 여름, 사고로 부모를 잃은 10대 소녀 맥 로린은 여동생 수전과 함께 소도시 로럴 애버뉴의 루스 챈들러 아줌마 집에 머물게 됩니다. 루스의 옆집에 사는 12살 데이비드는 맥에게 특별한 호감을 갖습니다. 계곡에서 함께 가재를 잡는가 하면, 카니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데이비드는 루스가 맥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친절한 아줌마였던 루스의 폭력은 데이비드에게 큰 충격을 안깁니다. 루스의 폭력은 점차 강도가 심해졌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들과 로럴 애버뉴의 10대들까지 끌어들이며 위험수위를 넘나듭니다. 데이비드는 지하 방공호에 감금된 채 끔찍한 고문과 폭력에 노출된 맥을 보며 그녀를 구하고 싶다는 욕망과 그녀를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루스의 폭력은 아무런 제약 없이 폭주를 거듭하지만 폐쇄적인 소도시의 사람들은 마치 공범인 양 무관심과 불간섭으로 일관합니다. 경찰마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무시하거나 외면할 따름입니다. 한편 무력감과 성적 호기심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데이비드는 맥을 위해 위험한 선택을 감행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밀하지만, 동시에 무관심과 불간섭이 공존했던 1950년대 미국의 소도시에서 벌어진 한 소녀에 대한 끔찍한 폭력일지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고통스럽고 참담한 경험이며 심지어 역겨움까지 느낄 정도였습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억압과 히스테리라는 정치적 분위기와 함께 보수적인 가족주의가 만연했고, 계층과 종교와 지식의 수준에 관계없이 아이들에 체벌은 당연히 여겨졌습니다. 그런 경향이 한층 두터웠던 소도시 로럴 애버뉴는 루스와 그녀를 따르는 ‘어린 악마들’, 그리고 맥 같은 희생자를 낳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전성기를 코앞에 둔 맥에 대한 루스의 폭력은 여성으로서 늙고 초라해진 자신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습니다. 없는 살림에 조카들을 떠맡게 된 짜증과 한탄도 한몫 거들긴 했지만 분노의 본질은 자신에게 쏟아지던 관심을 빼앗아간 것은 물론 거역과 저항을 일삼는 ‘아름답고 못된 맥’을 향한 참을 수 없는 증오심입니다. 그 증오심은 (루스 본인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본성’을 공격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발현됩니다. 구체적으로는 “맥 로린은 창녀!”라는 일관된 신념이 루스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너도 우리 엄마나 내가 했던 짓거리를 그대로 하게 될 거야. 이브의 저주, 그게 바로 여자의 약점이고, 여자는 다 매춘부나 짐승에 지나지 않아. 아랫도리에 구멍을 가진 멍청하고 패배의식에 젖은 창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너의 그 더러운 천성을 태워 없애버리는 거지.”
맥에 대한 최악의 폭력을 앞두고 루스가 질러댄 악마의 일성은 그녀가 맥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을 잘 설명해줍니다. 한마디로, 반사회적 인격 장애 중에서도 극단적인 사례인 셈입니다.
루스만큼이나 (아니면 훨씬 더) 독자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고문과 폭행에 가담한 ‘잡티 하나 없는 순수 악’으로서의 10대 아이들의 집단 광기입니다. 애초 아름다운 이방인 맥에 대해 품었던 선하고 순수했던 호기심은 루스의 지원 하에 순식간에 아무런 죄의식 없는 폭력성으로 전화됐고, 맥의 육체를 마음껏 유린하고 짓밟은 두 달간의 ‘지하실의 카니발’로 이어집니다. 특히 만 10살 밖에 안 된 루스의 막내아들 우퍼의 잔혹한 행위는 ‘폭력에 대한 원시적이고 끝없는 갈망’ 그 자체라서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화자로 등장하는 나, 데이비드의 무력한 태도는 시종 독자의 분노를 자아내지만, 극도의 폭력 앞에 노출된 12살 소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밀고자나 배신자가 되지 못한 것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두려움이나 호기심이 뒤엉킨 그 또래의 혼란이 안타깝게 여겨질 뿐입니다. 엔딩에서 그가 선택한 마지막 저항이 앞서 무력했던 태도를 상쇄해주긴 하지만, 그는 결코 맥을 만나기 전의 데이비드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독자는 읽는 내내 ‘잘못을 저지른 자와 이를 묵인한 자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쁜가?’라는 행간에 숨은 질문을 받곤 어느 쪽도 정답이 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번역 전에 이 작품을 읽은 뒤 “처음엔 작가를 미친놈이거나 성도착증 환자거나 반사회적 이상 성격자로 예단했다.”라는 번역자의 고백처럼 저 역시 작가에 대한 분노와 함께 ‘왜 이런 작품을 썼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들은 언제나 나를 두렵고 분노하게 한다. 오래전부터 이런 몹쓸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라고 밝힙니다. 하지만 이런 의도와 달리 다른 인터뷰에서는 이 작품을 ‘스너프 소설’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의도’와 ‘결과’가 조금은 엇나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웃집 소녀’는 1965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 - 한 30대 여자가 “올바른 여성이 되는 법을 가르친다”며 16살 소녀를 고문하다가 살해한 실화에 근거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이 소설의 가치는 폄하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번역자 역시 ‘실화’라는 점을 들어 ‘미친놈’이라고 예단했던 작가에게 면죄부를 내줬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참이나 착잡함을 피할 수 없었던 독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변명처럼 들렸습니다.
어지간히 잔혹한 이야기들을 많이 봐왔지만, 10대 소녀에게 가해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악마적 폭력을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출판사의 홍보 카피 - “당신은 악의 심연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 가 이 작품처럼 피부에 와 닿은 적도 없던 것 같습니다. 공포 그 자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모르겠지만 평범한 장르물 독자에게 추천했다간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작품입니다. 물론 그런 쪽의 취향을 가진 독자에게는 거꾸로 강추하고 싶은 작품인 것도 사실입니다. 호기심만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나름 단단한 각오가 필요할 것입니다.